230723주일예배_마8:23-27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2 viewsNotes
Transcript
혼란한 세상, 평화의 비밀
혼란한 세상, 평화의 비밀
제목: 요동치는 세상, 잔잔한 평화
본문: 마태복음 8:23-27
Matthew 8:23–27 (NKRV)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가 남의 설교문을 거의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대개 아실 겁니다. 그런데 요즘 가끔씩 예기치 않게 남의 설교 내용을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비평'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 몇몇 지면이나 인터넷에 심심치않게 등장합니다. 그 덕분에 다소간의 궁금증이 생겨 들여다봅니다. 대부분 유명한 사람들의 설교가 비평대상이 되고 있어, 사실 보지 않아도 대개 짐작할 만하지만 그래도 비평을 한다니까 가끔씩은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대개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설교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설교의 메시지가 매우 선명하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해 선명하다는 것이지, 달리 말하면 매우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 단순한 메시지는 대개 천당-지옥, 아니면 축복-저주를 기본구도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니면 조금 온건한 경우 잘 믿으면 복받고 잘못 믿으면 벌받는다는 내용이 메시지의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복잡한 삶의 현실에서 별로 고민할 것 없도록 간단명료한 답을 주는 방식입니다. 성서의 그 다양한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그 모든 내용이 그 구도 안에서 용해되고 그렇게 간단하게 집약됩니다.
대개 그런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그 단순한, 때로는 유치하고 저급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서의 본령, 그리스도의 길과는 무관한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자면 제 마음이 요동칩니다. 회의와 유혹으로 요동칩니다.
물론 그 현상의 실체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모든 선동의 기본원리는 복잡한 세상의 이치를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 축복과 저주, 선과 악으로 단순구도화시키고, 내가 선의 편에 있다고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이 모호하고 복잡하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그와 같이 선명한 구도에 매혹을 느끼고, 세상이 그렇게 정말 분명하게 갈라져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할 때 사고는 정지되고 성찰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 명쾌한 선동을 따라 요동칩니다. 오늘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고, 따라서 세계의 정치현실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네오콘'(Neo-Con)의 세계인식은 그런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풍미하는 현상 또한 그와 같은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따라 인식되는 세계, 그런 원리를 따라 인식되는 사람은 실상이라기보다는 그런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투영된 세계요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그들만의 마음의 세계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그 세계 안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각각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불안의 원인을 그 단순구도로 해명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불안의 근본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더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신앙은 불안과 공포에 대한 도피와 동일시됩니다. 그리고 도피처 안에서는 그들만의 열광적인 세계가 자리잡습니다. 불안과 공포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기에 저의 마음 또한 요동치는지 모릅니다. 삶의 진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며 진실을 깨달아가도록 하는 방식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간단 명료한 답을 찾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간단 명료한 답을 주어야 하지 않나, 너무나도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투명하고 확실한 미래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소위 목회가 성공하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제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정심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는 본문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 성서본문에 붙은 소제목,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의 진정한 초점은 예수님 당신의 모습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바다가 요동을 치고 따라서 배가 요동을 치고 결국 그 배에 탄 사람들도 안절부절 요동을 치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다급하게 살려달라고 호소할 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배가 요동치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허둥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태연스럽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떠 덩달아 요동치는 배, 그 배 밖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똑같은 배 위에 계셨습니다. 한 배를 탔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허둥대고 있는데 반해 단 한 사람 예수께서는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기 전에 그 요동과 상관 없이 스스로 잠잠한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진정한 초점이 있습니다. 세상과 모든 사람이 요동치고 있는데 홀로 잠잠하십니다. 그리고 이내 세상을 평정하시고 모든 사람을 진정시키십니다.
사람들은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 요동치고 소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태연스럽게 잠을 잘 수 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언뜻 보면 풍랑이 일어 배가 요동치는데 사람들이 허둥대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그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엎습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그 위에 역시 요동치는 배 위에서 허둥대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잠잠함으로써만 그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허둥댔고 예수님은 잠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태를 따랐고 예수님은 중심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 지혜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대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사태에 매몰되고, 즉각적으로 솟구치는 욕망에 매달리면 전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움직이는 사물만 볼 수 있을 뿐 전모를 볼 수 없습니다.
밭갈이를 배우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이랑을 반드시 일굴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하기를 "앞을 똑바로 보고 가라!" 했답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일군 밭의 이랑은 삐뚤빼뚤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반문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느냐?" 아들이 답하기를 "아버지 말씀대로 앞을 똑바로 보고 갔습니다" 했습니다. "앞에 뭐가 있었느냐?" "바로 제 앞 소 엉덩이만 바라보고 좇아갔습니다." "바로 저 앞에 나무를 기준으로 삼았어야지!"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마치 제자들은 소 엉덩이만을 바라본 꼴이었고, 예수님은 저 앞의 나무를 바라본 것과 같습니다.
요동치는 세상 한 복판에서 잠잠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요동치는 세상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을 깨우친 사람은 요동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고, 결국에는 요동치는 세상마저 평정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놀라운 일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평정심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요동치는 세상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삶, 그 평정심으로 요동치는 세상을 평정할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지옥의 저주와 천당의 보상 때문에 울고 웃는 태도, 눈앞의 불행과 행복 때문에 울고 웃는 태도로는 언제나 요동치는 삶을 살뿐입니다. 잘 되면 하나님의 뜻이요 안 되면 사탄의 장난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일희일비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 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 어디를 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게 만듭니다. 적어도 불안과 공포 때문에,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척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요동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진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평정하여 평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는 바로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평화롭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