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두렵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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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새벽설교
날 두렵게 하는 것
오늘 본문 마가복음 6장은요,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이 나오지만, 그 기적에 포커스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오병이어는 대단한 사건이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역이지만, 마가복음 6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제자들의 우둔함을 강조하는 장치로 오병이어라든지, 물 위에 걷는 기적이라든지, 이런 기적들을 사용하고 있죠. 52절 읽어봅시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여기서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보고도 오히려 둔해졌습니다. 의아하지 않나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우둔함에는 이러한 배경이 뒷받침 되고 있는데요, 1절부터 6절은 예수님이 고향 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고향 마을이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배척하는 상황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모시는 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선교지로 파송하십니다. 의아하죠? 그런데 제자들을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냐면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을, 마치 세례 요한의 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 당하고, 나라의 위정자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예수님을 참된 메시야로 믿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복음 9:19절에서 잘 설명하는데, 제자들이 선교보고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둥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아무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나 혼자 신앙생활 하나?” 이런 생각 들 때 많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봐도, 직장이나 내 친구들 중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두명 정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는 것 같아서 공감대 형성이 잘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죠. “저 사람은 믿는 사람인데 왜 저래? 저 분은 중직자이신데, 왜 본이 되지 않지?” 제대로 믿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게 교만한 마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신앙을 공유할 수 없는 외로운 상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생기냐면,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도, 예수님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성경 말씀보다, 세상적인 것과 타인의 결점과 실수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면, 제자들처럼 우둔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집회를 해도, 특새를 해도, 수련회를 해도, 기도응답이 되어도, 능력을 경험해도, 둔해지는 것이죠.
오병이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제자들이 선교 다녀온 후에 너무 피곤해서,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모여있는 군중을 빨리 귀가시키려다가 발생한 일입니다. 해가 저무니까, 군중이 배고플 것을 핑계로 집에 보내려다가 예수님께서 “먹을 게 있으면 너가 직접 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오병이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37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이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오천인분, 2만인분의 식비를 구해오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지, “먹을 것을 구해오라”는 말씀을 안하셨습니다. 우리가 대부분 생각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소유가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게 가졌다는 생각 때문이죠. 물질만 해당하는 게 아니죠. 예컨대, 은혜를 더 받아야 합니다. 또는 사랑을 더 많이 느껴야 합니다. 말씀이 더 깨달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 더 더를 요구하는데, 이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스스로 재단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왜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했는데도 왜 둔했겠습니까? 왜냐하면 오병이어가 “오천병” “오천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도 비슷한 기적들은 봤거든요. 심지어 죽은 소녀가 살아나는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우둔함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셔서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50절 읽어봅니다.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랍니다. 예수님이 유령처럼 보여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배 위에 계셨다면, 제자들이 이렇게 놀랄 일은 없었겠죠.
예수님이 우둔한 제자들을 다루는 방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자들은 자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더 더 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바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져야 두려움이 사라지는 줄로 알지만, 정작 너희의 욕심대로 해주지 않으시는 그 예수님이 없으면 이렇게 크게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걸 제대로 알려주고 계시는 것이죠.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깨달음을 더 요구하고, 기적을 더 요구해도, 정작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불만족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가 정말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때는, 기적이 없거나, 지식이 없거나, 기도응답이 없거나, 너희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없을 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배에 같이 안 탔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불만족은 우리의 둔함을,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낼 뿐이지만, 지금 나의 상황이 오히려 가장 평안한 상태이다라는 것,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금 상태가 가장 평안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고, 오늘도 이렇게 기도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해결되지 않은 기도제목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답답해 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다그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하라, 나다!” “다른 존재가 아니다. 나다!” “그러니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새벽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