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은 결과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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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결과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서론]
요즘 저는 예레미야를 읽으며 굉장히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진짜 맞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신앙관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신앙관도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서의 진짜 저자이신 주님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전통적인 신앙관에 대해 도전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레미야를 천천히 다시 읽어보십시오.
예레미야의 신랄한 비판들을 듣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비판들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듣다보면 상반되는 두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이건 나와 상관없는 그 당시 유다의 모습일뿐이야 하고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은 유다의 타락한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깨닫고 매우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부류입니까?
저는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읽으면 불편한 마음을 갖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불편한 마음이 그대로 머무는게 아니라 그 불편한 마음이 변하기를 원합니다.
그 마음이 내게도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예레미야서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예레미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 목록에는 우상숭배나 삶에서 행한 죄악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또한가지 죄가 등장합니다.
바로 의인에 대한 핍박입니다.
특히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죽이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참 예언자이기에 그에 대한 핍박은 곧 주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이제 보게 될 11장부터 20장까지는 곳곳에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들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째, 예레미야는 영혼의 고통을 겪습니다.
18-19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셔서,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들의 모든 행실을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해치려고 “저 나무를 열매가 달린 그대로 찍어 버리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은 먼저 죽음의 위협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싫어하고 핍박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죄악들을 지적하고 재앙과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은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약백성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나온 11장 1-17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그 언약을 유다백성들이 깨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다백성들은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마치 이단과 같았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전통 신학에 따르면 언약백성은 절대로 망할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한 주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셔야만 합니다.
우리 삶에 적용하자면 교회 열심히 다니고,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 따르면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열심히 드려도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증거가 드러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예레미야는 사람들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도 사람들의 핍박은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고향 사람들도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보시면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자신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느낀 배신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신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어린 양이 주인의 의도도 모른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고향 사람들의 음모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그들의 악함이 얼마나 심한지 보십시오.
19절에서 그들은 나무를 열매가 달린채 찍어버려서 세상에서 아에 없어버리자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를 죽여서 그가 했던 예언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자는 말입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큰 정신적 충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들과 친척들의 배신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이러한 위험을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처음 부르실때 하셨던 약속처럼 그를 보호해주시려는 것입니다.
12장 6절입니다.
그렇다. 바로 네 친척, 네 집안 식구가 너를 배신하고, 바로 그들이 네 뒤에서 소리를 질러 너를 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와도 너는 그들을 믿지 말아라.
그 당시 사회에서 가족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족과 친척들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가족이나 친척에게조차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냥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가족과 친척들은 그를 보호해주기는 커녕 그를 속이고 배신합니다.
예레미야는 가족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당했기에 극심한 외로움과 슬픔, 충격에 휩싸인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 가족들, 친척들이 왜 예레미야를 버렸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예레미야때문에 피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예레미야를 싫어하니까 자기들까지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무리 예레미야를 회유해도 안되니까 이제는 다수를 위해 한 사람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가족조차 그를 버렸기에 그가 도움을 구할 유일한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제 원수를 그들에게 갚아 주십시오. 제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비참한 심정과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토로합니다.
주님은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사람의 숨은 생각과 의도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재판관들은 겉만보고 잘못된 판결을 내릴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럴일이 없는 공의로운 분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원수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레미야가 화가 나서 요청하는게 아닙니다.
그 원수들의 징계는 예레미야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고난, 질병, 재앙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죄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레미야를 해코지 하려한 자들이 재앙을 받는다면 그것은 예레미야의 무죄함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그들을 벌할 것이니, 그들의 장정들은 칼에 찔려 죽고, 그들의 아들과 딸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 내가 아나돗 사람들을 벌할 때가 되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면 그들 가운데서 살아 남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예레미야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제거하려던 자들이 오히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되면 예레미야가 무죄하며 그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힘들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둘째, 예레미야는 믿음의 갈등을 겪습니다.
12장 1절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핍박과 고난을 겪는 예레미야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습니다.
왜 악인들이 잘되는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신은 고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예레미야는 이해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의인이 형통하고 악인이 저주와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보는 현실은 반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2-3절에 이러한 예레미야의 솔직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십니다. 주님은 저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저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찰하여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도살할 양처럼 끌어내시고, 죽일 날을 정하셔서 따로 갈라내 두십시오.
예레미야는 주님이 그들을 이 땅에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활개치는 것은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악인들이 이 땅에서 성공과 번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오직 말로만 주님을 언급할뿐 마음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 3절에 보시면 예레미야는 자기 속마음을 주님이 다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속마음을 다 아신다면 악인들을 도살할 양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끌어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혹시 주님이 악인들의 겉모습에 속고 계신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현실의 부조리한 모습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피조세계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악인들이 저지르는 죄악들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이 부분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때문에 땅이 슬퍼하고 모든 풀들이 말라 죽어갑니다.
짐승과 새들도 모두 사라질 지경에 처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때쯤 이스라엘 땅에는 극심한 가뭄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정이 이 지경인데 예레미야가 보기에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관심하셔서 악인들을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4절 후반절에 보시면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죄악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레미야가 아는 하나님은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현실을 못본체 하실지 주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은 부조리한 현실로 인해 겪는 믿음의 갈등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생각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사역의 열매가 있어야만 합니다.
단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자신의 예언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사역의 결과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대접을 받습니다.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역에는 많은 열매가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 건강과 부를 얻고 성공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병걸리거나 가난과 고통을 겪으면 죄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보았을때 도저히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예언자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 신앙관에 따르면 열매가 없는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이고, 열매가 있는 거짓 예언자들이 참 예언자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결과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골에 가보면 20명이 안되는 노인분들을 평생동안 사역하시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수천명, 수만명의 성도들을 목회하시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성공한 목회자이고, 누가 실패한 목회자인가요?
누가 복받은 목회자이고, 누가 저주받은 목회자인가요?
열매로만 따지자면 대형교회 목회자는 성공한 것이고, 시골 교회 목회자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정말 주님을 사랑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모두 세상에서 건강과 부, 성공을 이루신 분들인가요?
제가 아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참 훌륭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만 남겨졌습니다.
그럼 이 가족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산 위에서 선포하신 팔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임한 여덟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받은 자는 부자나 성공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복이 아닙니다.
주로 하나님을 의지할수 밖에 없는 절박한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들일까요?
이제 세상의 부조리함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예레미야에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이 조금 독특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예레미야를 책망하는듯 보입니다.
5절입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수 있다면, 요단 강의 창일한 물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사람과 달리기하면서 피곤해하면 어떻게 말과 경주할수 있느냐 물으십니다.
또한 조용하고 안전한 땅만 좋아하면, 어떻게 거친 요단강 물속을 경험하겠느냐 물으십니다.
이런 작은 일에도 힘들고 어려워하면 어떻게 더 큰 일을 감당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은 고통스러워하는 예레미야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도 못견디냐? 이래가지고 더 큰 고난이 오면 어떻하려고 그러냐? 이런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볼때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예레미야를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야, 작은 어려움이 있지만 힘을 내라. 앞으로 너에겐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올거야. 그때에도 나를 더 믿고 의지하렴. 용기를 가지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더 큰 위기를 겪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 십자가의 길, 대가를 치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처럼 고향 사람들의 배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배신도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주님은 그때를 대비하여 지금 이 일로 믿음과 용기를 잃지말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오늘 말씀은 의인이 겪는 고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악인들이 더 번성하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마치 부조리 천지인것처럼 보입니다.
권선징악은 영화를 통해서나 볼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너머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주님이 정의와 공의를 베푸실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인으로 살아갈때 형통보다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더욱 의지할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용기로 부조리한 현실속에서 불편과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된 삶입니다.
시편 37편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