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9 양청] 31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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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부분은 별로 안들어보신 이야기일수도 있다. 중생도 들어봤고 칭의도 들어보고 성화도 들어봤겠지만 실제로 “효과적 부르심”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분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한번 손들어보자. 효과적 부르심을 영어로는 ‘Calling’ 이라고 한다. 소명이다. 소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목사나 선교사들에게나 사용할 법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Calling’이라는 단어를 효과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에 사용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의 자리에 두셨다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연이 없는 것처럼, 예수 믿는 자들에게도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Calling 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단어가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 사역을 시키셨다? 이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사만 부르시는게 아니다. 선교사만 부르시는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목자가 양을 부름과 같이 모든 자녀들을 부르신다.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께 나올 수는 없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이것을 우리가 31문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함께 읽어보자.
31문. 효과적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답. 효과적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데, 이것에 의하여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비참을 납득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면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거저 제공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설득하시어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부르실 때 이를 그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시간 속에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 부르심이 효과적이라고 할 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아무개야!” 라고 부르신다. 왜 부르시는가?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누군가를 부르실 때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됬습니다, 저는 아직 믿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사람은 반드시 온다.
우리도 내일 노방전도가 계획되어 있지만, 때로 우리가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거나 혹은 친구들이나 가족원들에게 전도를 할 때 “예수 믿으세요"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던 사람들 중에 무시하고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때로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지나간다. 그런데도 교회를 안온다. 예수를 믿는 데까지 나아오질 않는다. 이것을 효과적이지 않은 부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분명히 구원의 자리로 부르기는 부르는데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심에는 이처럼 효과적이지 않은 부르심이 있고 또한 효과적인 부르심, 효력있는 부르심, 결과가 만들어지는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다.
교재 2번을 보면 이러한 효과적인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이 내 안에서 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은 외적에서, 바깥에서,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부르는 것이다. C번에 대상을 보라. 효과적인 부르심은 오직 창세 전부터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나타나고, 외적 부르심은 불특정 다수이다. 주체를 보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주체가 성령님이다. 그러나 효력이 없는 부르심은 주체가 목사 혹은 전도자, 신자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설명한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거듭나고 주님 앞에 나아온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도리어 돌로 치려 하고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부르심을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효과적인 부르심은 특별은총이다. 그리고 효력이 없는 부르심은 일반은총이다. 일반은총이라는 것은 일반계시도 그렇듯, 자연만물을 보기만 해도, 논리적인 추론으로도,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계시들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야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특별은총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연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 하늘의 해를 비추실 때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차별없이 베푸신다. 일반 은혜가 있다. 그러나 이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오라고 부르신다. 이런 의미에서 외적 부르심은 복음 전도라고 할 수 있겠고, 이러한 외적 부르심에 반응하여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영향을 받은 자들, 곧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말씀을 찾아보자. 고후4:5 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러한 바울의 외침은 외적 부르심이다. 효력 없는 부르심이다. 그런데 고후4:6 를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비치라고 언제 말씀하셨나? 창1 이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바울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외적 부르심이다. 그런데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으로 그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던 것처럼 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그 사람 마음에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게 중요하다. 소경이었다가 눈을 떴다는 것이다. 중생, 거듭남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이 행하는 외적 부르심을 통해서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내적으로 부르시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외적 부르심을 통하여 일어난다. 왜? 성령께서 구원의 사역을 행하실 때 말씀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이다.
4번을 보라.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소요리문답이 작성되던 17세기 때는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보다 신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서 다룬다. 그래서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다. 31문에 나와있는 것은 중생까지 포함된 이야기이다. 교재의 4번의 B를 보면,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비참을 납득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면서..." 여기까지가 중생에 해당하는 말이다. 다음 페이지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거듭남, 곧 중생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로서 난다, 혹은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서 신생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5번의 A. 정서의 변화이다. 중생하게 되면 죄와 비참한 상태에 대하여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가슴으로 와닿게 된다. 두번째는 지식의 변화로서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번째는 의지의 변화이다. 내가 구원자이신 그분을 붙잡고 그분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앞글자만 따서 이런 지정의의 변화가 우리 안에서 근본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이를 중생했다고 표현한다. 거듭났다는 증거.
5번의 B처럼, 중생이라는 것을 말할 때 종종 ‘기울어짐’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기울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기울어지지 않던 사람이 거듭난 이후로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화끈하게, 아주 극적으로 하나님께로 확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더디고 느리게 하나님께로 기울어진다. 평생을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주 서서히 하나님께 관심을 보인다. 영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조금씩 돌아서는 것이다. 중생의 순간을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만일 어느 순간부터 영적인 일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길 원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중생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러분, 이 내용을 잘 들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회심이라는 요소를 크게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회심을 중생에 포함된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구원파 이단이 수면위로 등장했다. 그 이전에도 구원파는 한국교회를 좀먹게 만들었는데, 아마도 세월호 사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 이단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육체의 탄생인 생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영의 거듭난 날 역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너 몇날 몇시에 구원받았는지 아니? 너의 영적 생일은 언제야?” 그러나 여러분, 거듭난 날, 중생의 때를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물론 알수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구원파는 이를 모르면 너의 중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한다. 무식한거다. 그런데 무식한 그들에게 우리도 덩달아 무식하면 그들의 꾐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잘 들으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은 경험적으로, 우리의 의식 안에서 다 확인이 되지 않는다. 중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내 안에 창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여자가 임신을 했다. 그런데 임신 초기에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분명히 바로 알 수 없다. 물론 간혹가다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리는 경우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여러 검사를 통해 확인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여러 검사를 통해 확인을 해도 그게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생명이 심겨졌지만, 그것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경우들도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이다. 회심이라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합친 것인데 이는 내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내 의식과 내 결단의 행위이다. 내가 결단하는 것이니 내가 모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저는 중학교때 회심을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저는 중학교때 중생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내가 중생한 것을 나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회심은 언제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이 먼저일까? 아니면 회심, 회개와 믿음이 먼저일까? 당연히 중생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셔야 그 사람이 말을 할 것 아닌가? 다시 살아나야 눈을 뜰 것 아닌가? 생명이 들어와야 반응을 할 것 아닌가? 생명이 들어오는 것이 중생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눈을 뜨고 그리스도를 보는 것,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회심이다.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어떻게 하셨던가 ? 요한복음을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며칠이나 지났다. 이미 무덤 입구에서는 썩은 내가 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무덤 입구에서 어떻게 하시는가? “나사로야 나오너라" 큰 소리로 부르셨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죽은 우리를 부르시는 장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에스겔 환상에 마른뼈에 생기가 돌면서 죽었던 몸이 일어나던 것처럼, 죽은 자가 주님이 부르시자 그 안에 생명이 생기고 그렇게 거듭나서 주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D를 보면, 성령님이 중생의 효과적 원원이 되신다고 했다. 말씀을 찾아보자. 살후2:13-14 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다. 이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무엇을 가지고 부르셨나? 복음으로 부르셨다 한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바울의 외적 부르심을 사용하셔서 이를 통해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은 다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는데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일은 없다. 부르심은 성령의 사역이다. 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니까.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다. 죽은 우리의 영혼을, 돌과 같이 죄로 인해 단단해진 우리의 영혼을 깨우신다.
5번의 E를 보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중생의 수단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데,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중생케 하신다. 약1: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복음을 들을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중생을 통하여 거룩한 성향이 창조되고, 복음을 깨닫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사실 의지의 결단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님의 효과적 부르심이다.
성령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복음을 통하여 이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우리가 전도할 때 전해야 할 것은 오직 복음이다. 예배시간에 설교자가 전해야 할 것도 오직 복음이다. 십자가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피 묻은 복음이 증거되지 않고서는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갖 좋은 말, 입에 바른 말을 전한다 할지라도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성령님은 오직 복음을 통해 효력있는 부르심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6번을 보라. 발생의 순서. 성인이 되어서 믿는 경우 외적 부르심, 중생, 효과적 부르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예수믿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신앙생활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복음을 듣게 되었다. 친구를 통해,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고, 곧이어 나의 죄인됨과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별로 대수롭게 듣지 않았던 그 복음의 말씀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운전하다가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펑펑 울기 시작한다.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외적 부르심,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동시에 일어난 경우이다.
반대로 유아세례를 받고 태중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중생이 이미 그 안에 심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축복이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복이다. 여러분들이 신실하고도 경건한 가정을 세워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언약 자손들을 생산하기 위해. 신실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중생이 이미 그 아이에게 심겨져 있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이 외적으로 표출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라해도 탈선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의식 속에서 자기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아직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는 회심을 체험하진 않았어도 그 방향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그가 거듭나긴 했지만 회심을 통하여 그의 거듭남이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것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자리에 거듭난 분들이 계시기도 하겠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본성이 선한 것과 거듭난 것은 다른 것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이다. 거듭남을 통해 거룩으로 기울어지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서적들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내 삶을 맡기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것이 거듭난 결과이다. 여러분은 거듭났는가?
또한 이 자리에 거듭난 분들 중에서도 회심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이고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아직 나에게 회심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물론 회심이 극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자 예수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며,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만을 더욱 붙드는 것, 이것이 바로 회심이다. 이는 나의 의지와 결단이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신 자만이 회심을 경험할 수 있는데,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의 자리에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길 때에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임한다. 그러니 예배의 자리에 부지런히 참여하라. 그리고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라. 그럴 때에 여러분에게도 새롭게하시고 회심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오늘 배운 것을 정리해 보자. 첫째, 구원은 내 이성적 판단과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전적인 성령님의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의 결과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칼빈주의를 오해하는 자들 중,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알아서 구원하시겠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인간의 외적 부르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적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며칠 전까지 주일학교 교사로 많은 청년들이 수고해주어 참 감사한데, 왜 교회가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는가? 그 복음을 통해서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헌신을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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