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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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두종류
믿음의 두종류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믿음과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믿음 있음이고 무엇이 믿음 없음인지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드러나는 외형으로 그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의지라면 의지가 강한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의지라고 말하기에는 빈약합니다. 한 쳥년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안에 신앙의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의문을 가지고 가정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나에게 고통이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내 삶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일까? 등등 그 친구는 자신에게 생긴 의문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앞에 돌아온 대답은 “믿음이 없어서 그래”였습니다. 우리도 가끔 듣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럼 이 이야기를 히브리서와 연결해 보면 어떻까요? 히브리서의 기록목적이 무엇입니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히브리기자는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오늘 성경에는 ‘믿음으로’라고 하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무려 20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너희가 핍박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 그래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해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살펴 봅시다.
먼저 저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기술방식입니다. 분명 1장~10장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우월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천사보다, 안식일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은 이야기를 했지만 11장에서 들어오면서 예수님의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대신 믿음이 등장하고 계속해서 믿음의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1장을 믿음장이라 별명을 붙혔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11장에서 믿음을 이야기 하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정리하는 장은 아닙니다.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11장 1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으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적어도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술했을까요?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은 제사였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의 실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보이지 않는 말이었지만 흠도 티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믿을 만한 증거가 되게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으나 믿음의 1차적인 변화는 믿음의 대상이 바뀐것입니다. 열심히 믿는 것 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상이 바뀐 것이고 믿음은 바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라면 믿음이 믿음의 대상이 바뀐 것이라면 우리에게 찾오는 고난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방치해 두실까요? 오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모세의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23절에서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 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24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모세에 부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려두시고 인류를 구원할 자로 택하실꺼야 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을까요? 또한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을 부를 수 없다고 믿음으로 그것을 포기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으로는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27절에는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모세는 왕에게 나아가는데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히브리 기자는 이것을 믿음으로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1장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 가운데 믿음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인물이 많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아내를 두번이나 부인했던 이 아닙니까? 이들이 이 모든일을 믿음으로라고 히브리기자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우리를 건지시고 보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이끌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라고 보다 자신의 내려 놓고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약속에 의심이 되기도 하고 원망도 있었지만 믿음의 대상을 놓치지 않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쓰내려 가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아 창녀 라합까지도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믿음이 강화되면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인과응보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현실속에 우리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러한 불가항력적 상황가운데 버려 두십니까”,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라고 하는 탄식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믿음없음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망을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다면 믿음의 대상을 바꾸고 있지 않기에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냐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대로 이루는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타내서고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쓰시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내가 주님 닮은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