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30 저녁] 가나의 혼인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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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93 주의 사랑 비칠 때에 /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본문 요2:1-11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3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려 한다. 그 키워드는 바로 ‘포도주, 돌 항아리 여섯 개, 하인들’ 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 속에는 사실 많은 신학적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하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세상이 주는 기쁨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오늘 본문이 이 부분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느 나라나 자고로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하여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푸는 관습이 있다. 물론 이스라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민족이든 결혼을 매우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결혼 예식은 언제나 축제 분위기에서 치러진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기에 축하하러 온 손님들에게 일주일간 대접할만한 풍성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어야 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고 일주일의 긴 시간동안 이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마음껏 축복하고 축하하는 기쁨의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일반 유대 서민들에게는 계속되는 중노동으로 인한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주일간의 축제기간은 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기쁨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한다. 손님들을 접대하고 손님들을 흥겹게 만들어줄만한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 보면 이미 포도주가 떨어져서 바닥이 나버린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더 이상 손님들에게 공급할만한 포도주가 없다. 잔치의 흥을 돋우는데 필요한 포도주가 바닥이 난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였다. 시104:15 에 보면 “포도주는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당시의 랍비의 문헌에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잔치에서 포도주는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기쁨을 상실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언제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인가? 그리고 언제가 가장 행복할 것 같은가? 예전에 만났던 어떤 분은 로또 1등이 되면 진짜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로또 1등 얼만지는 몰라도 예를 들어 100억이라고 치자. 그래서 100억 정도 타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혹 어떤 분들은 10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삶에 어떠한 것들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 같은가? 어쩌면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는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이 세상의 부함, 이 세상의 재물, 이 세상의 명예로만 치우쳐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로또 1등이 되어 100억을 타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중 33%가 세금으로 사라진다. 자그마치 33억이 증발한다. 이제 66억 조금 넘게 남았는데 이걸 타는 순간부터 기가막히게 후원단체에서 연락이 온다더라. 어떻게 핸드폰 번호와 집전화, 주소를 알아내었는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고 한다. 그래서 로또1등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니 대부분 불안장애를 겪거나 아니면 쫓겨나듯 외국으로 도피한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큰 돈도 언젠가는 소비될 것이고 통장의 잔고가 비게 되면 다시 행복은 사라진다. 10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한 겨울 그 큰집에서 난방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한 여름 그 큰 집에서 에어컨은 어떻게 틀 것인가? 결국 냉방도 난방도 쉽게 틀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 아파트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낡게 되어 수리가 필요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사람마다 항목이 다르고 정도가 다르겠지만 결국 이 세상의 것들을 기준으로 삼게 되면 그것은 무한한 행복을 결코 줄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의 포도주는 그것을 마심으로 행복을 느끼고 기쁨이 찾아오지만, 물질은 그 속성상 영원할 수 없다. 포도주는 소비됨으로 인간에게 쾌락을 제공하지만, 그 쾌락은 소비와 사용을 통해 찾아오는 것이기에 영원할 수 없다. 왜인가? 결국 포도주는 소진되어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포도주가 바닥남과 동시에 흥은 깨지고 사람들은 불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세상물질이 주는 기쁨과 쾌락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이 사람은 젊고 혈기왕성한 청소년 시기에 스페인에서 투우사가 되어 많은 군중들 앞에서 소를 죽이는 일을 했었다. 또한 그는 청년시절에 2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고, 그리스와 터키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쿠바에서 군수 공장을 경영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술과 여자에 빠져서 살기도 했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남는 기적을 경험하였기도 했다. 그는 또 아프리카에서 코끼리와 물소를 사냥하며 쾌감을 즐기던 자였다. 그는 또한 세 번이나 했던 결혼에 만족하지 못하고 4번째 결혼까지 했던 자였다. 그리고 1954년에 세상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노벨 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어찌보면 누릴만큼 누려보고 명예를 얻을만큼 얻어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62세가 되던 해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살함으로써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마감했다.
이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의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는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다. 그는 인생의 즐거움과 쾌락을 쫓아 한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인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채워 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면 만족하겠는가?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유한한 것, 곧 사라질 것, 곧 바닥날 것들만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들어 이제 영원하고 마르지 아니하고, 끊이지 아니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볼 내용이다.

둘째,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되신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는 두번째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되신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종종 ‘기쁨의 잔치와 감사’를 의미하였다. 왜 포도주가 기쁨이요 감사인가?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소출을 지켜 주시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고, 그로 인하여 양질의 포도주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나 좋은 포도주가 있는 곳은 기쁨이 있는 곳이었고, 잔치의 자리였으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자리였다. 성경 안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서의 포도주가 등장한다. 멜기세덱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갈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갔고, 노아도 홍수 심판이 끝난 후 땅의 첫 소산으로 포도주를 담가 마셨다. 그리고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하자면, 잔치의 자리, 감사의 자리, 기쁨의 자리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잔치가 엉망이 되고, 기쁨이 떠나가며, 당황하고 수군거리며, 욕 얻어먹고 즐거움이 다 사라졌다.
생각해보라. 이미 바닥이 훤히 드러난 포도주를 다시 손님들에게 공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공급하려면 포도주를 빨리 사오거나 즉석에서 만드는 시늉이라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 본문의 말씀 6-8절을 함께 읽어보자.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였는데, 주님께서는 물을 담아 저들에게 주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어디에 물을 담아 주라고 하셨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어디인가? 돌항아리이다. 돌항아리는 어디에 사용되던 물건인가?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던 돌항아리임을 밝히고 있다. ‘정결예식’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로 신체적인 정결, 둘째로 제의적인 정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죄로부터의 정결이다. 사도요한이 이 장면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의 종교의식으로서의 정결예식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식사 전에 위생적 차원으로서의 씻음이 아니라 율법에서 정한 불결과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는 제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이러한 물을 담아두던 항아리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연회장 입구에 두어서 들어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족을 깨끗하게 씻게 하였던 이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연회장에 갖다 주었더니 시간의 경과 없이 즉각적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되었고, 그 포도주는 그동안 맛보았던 어느 포도주보다 극상품의 맛이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이 사건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을 기적이나 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표적, sign으로 설명한다. 표적이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 표적을 단순하게만 보면 이 사건이 왜 예수님이 영원한 기쁨 되심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본문의 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돌항아리이다. 여기서 두세 통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을 가득 채우라 하신 것을 보면 이 항아리는 텅 빈 항아리였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사용하던 텅 빈 돌항아리는 곧 참된 믿음이 결여된 유대의식의 공허함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 없는 예식들은 아무리 그 예식에 열심히 참여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없다. 그것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 율법이 정한 정결예식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감사와 은혜를 누릴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항아리는 정결례를 위한 물을 담는 항아리였다. 따라서 결혼식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항아리 앞에 멈춰서서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입장 가능했다. 저들만의 정결예식이었고, 또한 율법이었다. 이 돌항아리가 몇 개인가? 6개이다. 성경은 7을 완전수라고 알고 있는데, 일곱보다 하나 적은 숫자라는 것은 곧 율법으로 우리가 완전히 정결을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선한 것이지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율법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가 그 누구도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율법을 의미하는 이 돌항아리와 그 안에 담긴 물. 이것을 주님께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 포도주, 즉 최고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다. 주께서 주신 참 기쁨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완전하거나, 유한하지 않다.
이사야51:11 말씀에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하나님께 택함 받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있다. 이 시간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기쁨이 임한다고 말씀한다. 아멘인가? 영원한 기쁨이 저와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이 기쁨은 세상 그 누구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요, 영원히 바닥나지 않을 충만한 기쁨이다. 결코 세상이 줄수 없는 참되고도 영원한 기쁨이다.

셋째, 성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시는 세번째 교훈은 무엇인가? 셋째, 성도는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길 바란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 표적을 가장 곁에서 목격한 사람은 누구인가? 마리아이다. 마리아 외에는 또 누가 있는가? 연회장인가? 연회장은 물이 변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면 누구인가? 9절 말씀을 보니 ‘물 떠온 하인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종, 노예’를 지칭하는 단어는 ‘둘로스’ 이다. ‘둘로스’라는 단어는 자신의 의지를 접어두고 상전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해야 행해야 하는 노예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하인’이라는 단어는 ‘둘로스’가 아니라, ‘디아코노스’이다. 이 단어는 하인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협조자, 동역자’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이 하인들은 값을 주고 고용된 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잔칫집의 일을 돕던 자들임을 의미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이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할 수도 있지만 거부할 수도 있었던 자들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저들을 찾아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미리 당부하였던 것이다. 정결예식에 사용하던 물 항아리에 물을 담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아 예수님께서 식장 입구에 이 항아리를 갖다 두게 하시겠구나. 정결예식에 사용할 깨끗한 물을 담으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하여 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귀까지 채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 하셨을 때에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물을 떠서 갖다 주라 하실까? 이건 분명히 물인데, 내가 직접 담은 물인데’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돌항아리는 6절에 보면 ‘두세 통’이 들어가는 양의 항아리였다. 당시 한 통은 약 40리터에 해당하기 때문에 한 항아리에는 대략 100리터 정도의 많은 물이 담길 수 있었다. 하인들이 그 항아리 아귀까지 물을 담았으니 100리터 물이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당시 연회장은 집 주인으로부터 잔치를 주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연회장은 손님들에게 나갈 음식을 책임졌다. 따라서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 먼저 연회장에게 맛을 보게 하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물로 채운 항아리의 물을 연회장에게 떠서 갖다 주라 하였을 때, 하인들이 한 바가지 소량의 물만 떠서 연회장을 갖다 주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래 포도주는 큰 통에 담가두고 그것을 작은 통에 따로 담아 보관하게 된다. 본문에서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한 컵 정도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항아리 속에 담긴 물을 식장 안에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기 편한 작은 통으로 옮겨 담았고, 그 중의 하나를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며 맛을 보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면 지금 하인들의 행동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저들이 지금 작은 통으로 옮겨담고 있는 것은 아직 물이 포도주가 되기 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손님들에게 물을 나눠주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중 저와 같이 좀 삐딱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예수님께 항의를 했을런지도 모른다. ‘주님! 포도주가 떨어진 마당에 왜 물을 먹이게 하십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포도주 좀 마시고 취했기로서니 물을 포도주라고 착각이라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인들 중 어느 하나도 이와 같이 주님께 항의를 하지 않고 묵묵히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100리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항아리 여섯에 담긴 물은 포도주를 담는 부대나 작은 통으로 옮겨져서 식장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은 단 한 번 물을 떠내어 연회장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항아리의 물을 작은 통으로 퍼담았다. 작은 통에 옮겨 담은 물의 일부를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날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 중에 ‘소오오오름’ 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하인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열심히 작은 통으로 옮겨담았던, 조금전까지 확인했던 물이 최상급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저들의 순종으로 인하여 연회장을 비롯하여 식장에 참여한 모든 손님들에게 참 기쁨이 임하게 된 것 아니겠나.
성도 여러분,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맞지 않고, 비상식적, 비논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가장 높은 지혜보다 높으시다. 때로 이해가 안되고,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 참 기쁨을 더하여 주신다. 이것은 가나의 혼인잔치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기쁨, 신령한 기쁨을 충만하게 부어 주신다. 이것은 먹다보면 금새 바닥날만한 얄팍한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하인들을 기억하라. 저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할 자유가 있었음에도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고, 내 판단과 다르고, 세상의 이치와 다르다 할지라도 순종했을 때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나 노예로 삼지 않으셨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맞아 주셨다. 우리에게 자발적인 의사를 함께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자발적인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기뻐하신다.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을 때,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못할 맛좋은 포도주, 최고의 기쁨을 목격하고 누렸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인 의지로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지경 가운데 넘치는 기쁨, 충만한 기쁨을 내려주실 것이다. 이러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송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기도하자.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되시는 주님, 이 세상의 허황된 기쁨을 쫓아 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요 만족이 되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는 주님의 뜻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주님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그래서 세상 무엇에도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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