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입을 거룩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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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2-12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하셨나요? 매일같이 쉴 새 없이 말을 하는데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고 생각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속에 엄청난 말의 힘이 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10여 년 전에 MBC 아나운서실에서 사람의 말에 관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갓 지은 흰 쌀밥을 각각 2개의 병에 담고 한쪽 병에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좋은 말을 붙여 놓고요. 또 다른 병에는 “짜증 나” “미워죽겠어” 이런 나쁜 말을 붙여 놓고 아나운서들이 한 달 동안 지나다니면서 그 병에 쓰여 있는 대로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각각 말해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한 달 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화면을 보여 주세요. (이미지)
화면에서 보시는 것처럼 좋은 말을 들려준 쌀밥에서는 하얀 곰팡이가 피어오르면서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났지만, 나쁜 말을 들려준 쌀밥은 그냥 썩어버렸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단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들려줬을 뿐인데 너무도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다른 결과를 보여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게 만약 밥풀이 아니고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나 나랑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고 생각을 해 보세요. 정말 말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 주는 실험 아닙니까? 무생물인 밥풀조차도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면 같은 사람끼리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죠.
이 실험을 진행한 아나운서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배설하는 말이 아니라 배려하는 말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여러분들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 어떤 종류의 말을 많이 하셨습니까?
그런가하면 얼마 전에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사연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막 20대 초반에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로서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고인이 숨지기 일주일 전에 같은 반 아이들끼리 다투는 일이 있었는데, 한 학생이 친구의 이마를 연필로 긁었나 봅니다. 그랬더니 피해 학생의 학부모가 교무실까지 쫓아와서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교사 자격이 없다”라면서 강하게 항의를 했다는 것이죠. 뭐 이것은 한 일부분인 것 같고 부모 입장에서 속상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인이 생전에 담당 학생 학부모들로부터 막말이 섞인 항의를 들어왔다고 동료 교사들이 제보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초반 어린 나이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은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말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쌀밥 실험처럼 말로 한 사람의 마음을 썩게 할 수도 있고 살아나게도 할 수 있습니다. 말로 꿈을 죽일 수도 있고 꿈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저지르는 실수 대부분은 잘못된 말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마귀는 말로 세상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정말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에 기름 부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승리하는 인생과 패배하는 인생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말을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에 따라서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사람의 혀를 말들의 입에 물리는 재갈과 또 배를 조종하는 키에 비교하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작은 것이 전체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말은 작은 재갈 하나만 물리면 조종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배의 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키이지만 항해사가 키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배 전체가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에 있어서 혀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인생 전체를 통제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가 말과 배의 방향을 제시하듯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 인생 전체를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대인기피증이 심하신대요. 어릴 적에 이분이 사촌 동생이랑 물놀이를 갔습니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사촌 동생이 자기 눈앞에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어른들이 달려와서 이 동생을 끄집어냈을 때는 이미 차디찬 시체가 된 후였습니다. 근데 문제는 달려온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서 “차라리 네가 대신 죽었어야 했어”라고 아주 야박하게 한 마디 던지셨대요. 그것이 이분의 인생에 평생 남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이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시킨 거예요.
여러분, 말의 영향력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이 말이 인생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5-6절 합독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분, 산불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온 숲을 태워버리는 산불이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버린 담배꽁초 하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군대 있을 때 산불 진화 작업에 투입된 적이 있었는데요. 불이 난 현장에 가보니까 정말 무섭더라고요. 어지간해서는 불길을 잡을 수도 없고 불길을 잡았다 하더라도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린 뒤 아닙니까?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혀는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의 씨앗들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뿌려지게 됩니다.
혀가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 혀가 인생 전체를 불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야고보 사도가 참 독한 표현을 썼지만, 사실 정확한 표현 아닙니까?
“입술에 30초 가슴에 3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에서 나간 말이 불과 30초밖에 되지 않지만, 상대방의 가슴속에는 30년을 남아 있다는 말이죠. 잠언 18:21 합독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이거 굉장히 중요한 말 아닙니까? 자기가 말한 대로 말을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 욕하는 분, 비판하는 분들을 보면 사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이 이 영적인 원리를 아신다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본인이 한 저주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와 후손까지 무너뜨린다는 걸 알고 하는 것일까? 그런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을 좀 세게 하시는 어머니가 계셨어요. 어느 날 아들을 야단치다가 너무 화가 나서 “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식아”라고 하셨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강하게 어머니의 마음을 치시면서 말씀하셨대요. “네 말대로 해 주랴?” 두 번이나 연거푸 “네 자식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식으로 내가 만들어주랴?” 강한 책망의 말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어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다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입술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온갖 축복으로 구원해 주었는데 불평불만을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다 우리 다 죽겠다”라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네 입술에서 들리는 대로 내가 행할 것이다.” 그래서 진짜 다 죽지 않았습니까? 40년에 걸쳐서 하나하나씩 죽어갔어요. “아니다. 살겠다”라고 말했던 여호수아 갈렙 빼고는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정확하게 임하는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함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어 못 살겠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심지어 좋은 것을 대할 때도 뭐라고 표현하죠? “진짜 죽인다” (다 죽여요 그냥!) 우리가 이런 표현을 씁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욱 말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뒤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의 권세를 주셨어요. 그 말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되는 게 아니라, 장난처럼 툭툭 뱉은 말에 열매를 여러분이 거두게 될 거란 뜻이에요. 내가 안 거두면 내 자손이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부모는 말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장난처럼 푸념처럼 스트레스 푼다고 내뱉은 말들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으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언어 습관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어느 날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제 딸과 대화를 하는데, 말을 툭툭 너무 기분 나쁘게 말대꾸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한테 말을 함부로 하면 되느냐?”고 혼을 냈더니 “아빠는 엄마한테 더 하잖아?” 그러는 겁니다. 저도 몰랐던 저의 언어 습관을 제 자식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축복의 언어, 전의 언어를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대로 여러분의 운명을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 뒤에 어둠의 권세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이 야고보가 우리의 혀를 말 재갈로 비교했잖아요. 말 재갈은 말의 야성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왜 배 키로 비교했습니까? 배 키는 폭풍과 싸우면서 방향을 잡아야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술을 제대로 쓰려면 입술을 더럽히려는 마귀의 권세와 계속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가만히 두면 반드시 마귀가 어떨 어떤 순식간에 우리의 감정을 장악하고 입술을 장악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은 오직 하나님만이 통제해 주실 수 있습니다. 7절과 8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의 혀를 길들이기 힘든 무서운 야생 짐승에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야생 동물들과 맹수들도 서커스 같은 걸 보면 인간의 손으로 길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혀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8절 말씀에 “마치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치 꿈틀거리는 코브라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일단 물기만 하면 사람을 죽게 하는 맹독을 가진 것이 입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정화하는 것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이 입술의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능력으로 정화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절망에 가득 차 있던 여인을 살리고 마을 전체를 살려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성령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잘 사용해서 승리하는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 언어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입이 거룩해질 수 있을지 두 가지의 대안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의 입이 거룩해 지기 위한 첫 번째 대안은 “비판의 말로 월권행위 하지 않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외모든 뭐든 우리는 남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런 평가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쳐서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남에 대한 비판의 말을 내 입에 담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라고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신랄하게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개척 초창기 때인 것 같아요. 어떤 권사님이 등록을 하신 후에 매일 새벽기도회를 나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왜 이 교회는 권사들이 왜 새벽기도회를 안 나오냐는 거예요. 그래서 이목사님이 ‘권사님, 죄송하지만, 그렇게 말씀 하실거면 새벽기도회 나오지 말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저는 소심해 가지고 그런 말 못 해요. 그건 이찬수 목사님이니까 하시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형제를 비판하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여러분들 너무도 잘 아시는 말씀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영어 성경을 보면 비판을 ‘판단’이라는 뜻의 ‘judgment’(저지먼트)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머리로 이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사도 바울은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말 뒤에는 그를 멸시하는 교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4:10 합독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비판은 우리를 상대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자기가 더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는 말을 할 때는 잔인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졌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판할 때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가 막히게 되고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12:18 합독
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 할 때 양약이 ‘여호와 라파’ 할 때 ‘라파’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는 치료 요소가 흘러나온다는 뜻 아닙니까?
제 목회에 양약과 같은 치료 요소를 주시는 분이 취임식 때 설교를 해 주셨던 목익수 목사님이신데요. 이분을 뵈면 참 신기한게요. 뭐 몇 마디 하지 않으세요. 힘든 것 있으면 공감해 주시고 그 뒤에 몇 마디 해 주시는데 그냥 저한테는 ‘라파’ 양약이 되더라고요.
반면에 어떤 분은 말을 하는데 형제 가슴에 칼을 찔러요. 상처를 줘요. 생각 없이 던진 이 칼 같은 말 한마디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인생에 평생 피 흘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극단적인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 아십니까?
교회에서 끊임없이 함부로 비판하는 말 때문에 비수를 꽂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그런가 하면은 또 지혜로운 사람들로 인해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를 격려하세요. 장점과 가능성을 격려해 주세요.
저도 고3인 제 아들 녀석에게 양약을 주려면 한참을 고민해야 해요. ‘아 저 복 받을 녀석. 머리를 저렇게 노랗게 염색하니까 밤길에 사고 날 일은 없겠구나’ 이러면서 양약을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또 아내 또한 비판하지 말고 격려해 주세요. 어떤 분은 본인이 평강공주라고 착각하시고 바보 온달 같은 남편을 내가 사람 만들겠다고 ‘남편 재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결국 남편은 안 변하고 본인만 울화통에 빠졌다고 하잖아요? 부부가 함께 예배드리러 오신 분들, 남편분들이 혹시 졸더라도 쿡쿡 찍어서 깨우지 마시고 오히려 푹 주무시도록 내버려 두세요. 졸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남편분은 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를 책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문제를 가장 지혜롭고 온유하게 지적하시고 상처 없이 고쳐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인생을 고치는 일은 성령님께서 하실 일이지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월권행위입니다. 함부로 비판하는 사람은 오히려 성령께서 하실 일을 가로채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고치고 싶은 비판의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사람을 고치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비판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마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경직되어 버려요.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판의 시간을 줄이고 기도의 시간을 늘려 보세요. 성령님께 맡기십시오. 오히려 여러분들의 영적인 영향력이 더 커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룩한 입을 가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두 번째 대안은 “비판하는 말 대신 살리는 말로 대언하기”입니다. 에베소서 4:29 합독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덕을 세우는 데 선한 말은 한마디로 형제를 영적으로 살리는 말이에요. 기쁨을 주는 말이에요. 사람에게 꿈을 주는 말이에요. 슬퍼하고 있는 형제를 일어나게 하고 사람을 치유하고 가능성을 불어주는 비전의 말입니다.
영국 출신의 인도 선교사셨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은 간디와 교류를 할 정도로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분이셨습니다. 이분이 인도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시다가 89세가 되던 해에 중풍에 걸리셨습니다. 뭐,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선교 활동도 그만두실 때가 됐는데 이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의 마음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너무도 크신 거예요. 그런데 중풍에 걸려 누워 계시니까 너무너무 답답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선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직도 구원해야 할 영혼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지금 이렇게 누워가지도 어떡하냐고 그래서 이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이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이 자기를 담당하는 간호사에게 굉장히 독특한 부탁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부탁인가 했더니 “간호사님, 간호사님이 제가 누워 있는 병실을 들어올 때마다 저한테 이렇게 말씀해 주세요. 스탠리 존스 일어나 걸으시오!” 이렇게 말을 해 달라는 겁니다. 이 젊은 간호사 입장에서는 연세가 89세나 되신 어른께 명령하듯이 “일어나 걸으시오!”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워낙 환자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까 그때부터 선교사님이 누워 계시는 병실을 갈 때마다 간호사가 계속해서 선포했다는 겁니다.
“스탠리 존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중풍으로 쓰러진 지 6개월 만에 다시 일어나 걷게 되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게 무슨 주문처럼 그걸 계속 들려줘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게 뭐냐면, 인간이 가진 언어 습관이 특히 이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주저앉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말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비판 대신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어느, 어느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시더라, 목회 참 잘하시더라, 그런 능력 있는 목사님들이 부럽다고 할 때마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거든요. “당신도 좋은 목사가 될 것이다.”라고 선포해 주었거든요. 남편인 저를 향해서 그런 말을 선포해 주니까 제가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누구랑 비교하지 않게 되고 반드시 목회의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거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 아이들의 기를 죽여도 하나님은 부모인 여러분을 통해서 그 아이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갈 때, 남편이 출근할 때 말씀을 많이 선포해 보세요. 내게 주신 성경 구절을 포스트잇으로 써서 문설주에 바르듯이 현관문에 붙여 놓고 읽어 주세요.
잔소리를 하고 싶을 때 야단치고 싶을 때,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 “이런 축복의 통로 같은 녀석” 이러면서 복을 선포해 주세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붙여 주셨더라도 “너는 하나님의 사람, 너는 사랑스런 하나님의 열매” 하면서 축복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살리는 말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비전이 있고 은사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살리시고 축복하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살리는 말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적용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들어오게 하기입니다. 골로새서 3:16-17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누구의 이름으로 하고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여러분, 우리 입술이 비판하는 말이 아닌 생명을 선포하는 말을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이게 먼저라는 겁니다. 말씀이 내 안에 계속 공급돼야 합니다. 비판하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정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매일 함께하는 공동체성경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벌써 한 해의 중반부를 훨씬 넘어섰는데, 여러분들 잘 참여하고들 계십니까? (일일이 다 읽으셨는지 체크를 하고 싶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잘 하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빠짐없이 잘 참여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하루에 20분 말씀을 듣고 보면서 매일 통독을 하다 보면 어떻게 그날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렇게 내년까지 한 번 더 ‘공동체성경읽기’를 한 다음에 3년 차부터는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읽기’를 통해 한 걸음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통독만 하지 않고 말씀묵상 훈련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독한 언어들을 버리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언어들로 채운다면 그 인생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에스겔 37:1 합독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여러분, 지금 에스겔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가지고 골짜기 가운데서 아래를 보고 있는데, 뼈들이 가득한 거예요. 환상 중에 이거를 보고 있는데, 주님이 물으십니다. “이 뼈들이 살아나겠니?” 그런데 에스겔이 자신이 없어서 애매모호하게 답을 해요.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명령을 하시거든요. “이 마른 뼈들에게 네 입술로 선포해라”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게 에스겔 37장인데요. 저는 에스겔 37장에서 제일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 하나에 주목하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 제일 빈번하게 나오는 단어가 “대언하라”입니다. “대언하라” 에스겔 37:7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또 37:9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37:10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흐름이 읽어지십니까? 지금 에스겔과 하나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 안에서 ‘여호와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의 입을 통해서 “대언하여” 선포할 때 생명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이 있으심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의 힘을 믿으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주시겠어요? 어디에서 말씀을 대언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문제를 만나 죽겠다고 하는 이에게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힘든 것 다 알겠는데요. ‘죽겠다’가 아니라 ‘주께 있다’라고 선포하는 거예요. 이걸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선포가 대언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은혜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야고보서의 결론의 말씀처럼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까지 무화과나무처럼 메말라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단물이 아닌 짠물을 내는 입술이 되어 계시겠습니까? 비행기를 타 보신 분들 아시잖아요? 맨 처음에 안내 영상에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바다에 빠져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 되면 산소마스크가 내려 나오잖아요? 누구부터 씌워달라고 합니까? 어린아이나 노약자들을 먼저 씌워주라고 하나요? 보호자인 자기 자신이 먼저 쓰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착용한 후에 유아나 노약자를 착용시키라고 합니다. 왜? 내가 먼저 산소를 공급받는 안전한 상황이 되어야 약자를 살리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먼저 회복하셔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단순히 “이제 비판하는 소리 하지 않겠다” 이렇게만 적용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회복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말씀으로 성령으로 회복되어야 자녀를 살릴 수 있고 믿지 않는 내 가족 내 배우자를 살릴 수 있는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요. 바로 이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주님 내가 먼저 회복되길 원합니다’라는 마음을 담아 함께 찬양.
❙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겠는데요. 여러분, 우리의 입술이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내 위치를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공로없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에요. 남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월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가하면 “주님, 이제는 제가 비판의 말 대신 살리는 말을 대언하는 사람이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회복하셔야 합니다. 입술에 은혜를 주시도록 이 시간 간절히 마음 모아 함께 통성으로 기도.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입술이 먼저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감히 누굴 비판할 자격도 없는 제가 혹 상처를 주고 넘어뜨리는 입술은 아니었는지요? 성령님께서 하셔야 할 일들을 가로막는 비판의 입을 거룩한 말들, 격려와 사랑의 언어로 채워진 입술이 되도록 성령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비판하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대언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거룩한 입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나 한 사람의 회복으로 인해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