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8 금요기도회 : 이사야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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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백성을 회복하시길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도 저희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도회 자리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주간 저희의 삶을 돌아보며 베풀어주신 무한한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백성처럼 살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저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회복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말씀을 통해 저희의 영혼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저희로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6:1-7 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6:1–7 NKRV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6장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부분입니다.
이사야는 선지서에 분류된 성경입니다. 선지서의 시작은 보통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고 임명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독특하게 6장에서 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1장에서 5장까지 당시 남유다의 시대적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남유다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자 하나님께서 심판을 예고하시고 다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킬 것을 이야기한 뒤에 이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이사야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1절부터 보시면 당시 남유다는 웃시야 왕이 죽고 악한 왕이었던 아하스가 왕위를 물려받는 시대적 상황을 먼저 소개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먼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1절 하반절부터 3절까지 이어진 환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바로 하나님은 거룩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왕이시라는 것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이사야가 보인 반응은 5절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입니다.
이사야는 지극히 거룩한 왕이신 하나님을 자신이 뵙게 되니 그에 반해 자신은 너무나 부정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과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니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약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을 뵌 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하나님을 봤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 떠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이 창세기 32 장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는데 씨름할 때는 몰랐지만 씨름이 끝나고 보니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대면한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두렵고 떠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은 이처럼 대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보고 싶다던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면 죽을 수 있으니 뒤돌아 있을 때 그의 어깨를 만지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한 이사야는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남유다 백성 또한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백성임을 고백합니다. 5절 중간에 보시면 이사야는 ‘부정한 백성 중에’라고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이사야는 자신을 포함한 남유다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존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죄인인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그를 부정한 백성인 남유다의 선지자로 세우시기 위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이사야의 목회적 마음도 드러납니다.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부모가 자신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자녀를 구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처럼, 이사야는 자기 자신에 완전히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고백에 하나님께서는 6절과 7절에서 그에게 천사를 통해 손을 내밀어주십니다. 6절과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그 입술을 숯을 통해서 이사야의 죄를 속죄시켜주십니다. 바로 5절에서 말한 ‘부정함’이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의식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의식적인 부정함뿐만 아니라 이사야의 죄책감과 죄까지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숯은 속죄의 능력이 담겨있는 마법의 숯이 아닙니다. 이 숯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죄를 깨끗하게 만드는 정화와 용서의 기적적인 성취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은 은혜의 행동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속죄를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고, 속죄를 얻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더 나아가서 죄로 인한 어떠한 파멸 속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었던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사야의 죄를 없애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스랍을 통해 제단에서 숯을 가져와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에 대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행동은 이사야의 죄를 속죄하심으로써 더 이상 죄가 이사야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이사야가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베푸신 속죄로 인해 죄는 더 이상 하나님과 이사야를 분리시키지 못하게 되었고 이사야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경험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없기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과 죄를 인식했을 때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고백된 죄를 제거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경험은 앞으로 그가 남유다의 선지자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선지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함한 남유다 백성 전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그러나 이러한 죄를 고백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제거해주심으로써 회복시켜줄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앞으로의 이사야의 사역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사야의 사역에 자신이 선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남유다 백성이 회개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길 바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 앞에서 남유다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남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 좋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유다의 왕조차도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이사야와 같은 사역을 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은 왕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조차 만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외식과 교만 등 다양한 죄를 지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이 굳은 백성으로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이처럼 너무나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이사야가 죄를 해결할 수조차 없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속죄해주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치 부모님의 잔소리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기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알려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은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속죄를 베푸심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용서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를 알려주시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마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살펴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걸치적거리고 꺼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살펴본 뒤에 목사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죄 선언입니다. 사탄도 우리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지적하지만 하나님의 지적은 사랑이 담긴 지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단지 지적만 하지 않으시고 “얘들아 죄를 지었니? 그렇다면 나에게로 와라.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나의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단다. 나에게 오면 너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단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괴롭히는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실 때 그에게 자신의 거룩함과 이사야와 유다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죄를 제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과 그분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시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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