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왜 해야하죠?? 그냥 쉬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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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8–11 NKRV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필요할 때

정말 은혜롭고 뜨거운 시간을 달려 정말 뜨거운 8월의 초입에 왔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일과 사랑’ 이라는 주제로 말씀들을 보며 크리스천으로 바라보아야할 ‘일’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일과 사랑 중에서 ‘일’을 맡아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6월 말미에 아주 잠깐 일과 사랑에 대한 설문을 받았었는데, 사랑에 대한 질문이 많았지만 일에 대한 질문에는 굉장히 의미 있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심오했는데요. 질문은 이랬습니다. ‘일’ 단 한글자 너무 심오해서 한 참동안 생각했습니다. 왜 ‘일’ 한 글자일까? 묻고 싶은 내용이 있을텐데, 왜 ‘일’ 한 글자만 써서 보냈을까? 별로 의미없이 그냥 쓴 걸 수 도 있지만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우리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거나, ‘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우리에게는 낯설거나, 너무 애매모호한 범위라서 어떤 질문을 해야할 지 모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죠.
말씀을 나누기전 여러분에게 질문하며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일’ 또는 ‘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목회의 길에 서기전에 정말 다양한 일을 했었는데요. 고3부터 주유소, 음식점, 아버지를 도와서 폐드럼 수거하는 일, 성인이 되어서는 학교 급식실, 건설현장, 키즈카페, 학교 조교, 개인 사업등 다양한 일들을 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에게 ‘일’이라는 것은 단지 ‘생존’이라는 키워드 말고는 다른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일’의 의미는 너무 달랐고 이 ‘일’의 진짜 의미를 알고 나서는 제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세상 가치관의 충돌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공동체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보내진 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러지역에 흩어져 있으면서 믿음을 지켜오고 있었는데, 이들안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흩어져 여러 문화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그 문화와 자신들의 신앙이 섞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 안에 있던 가치관들이 고스란히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도 섞이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우상숭배, 철학적 가치관이 섞인 신앙관등 다양한 모습들이 이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었죠. 당시 여러 교회들에게 일어났던 현상들이었지만 베드로전서의 편지를 받던 성도들은 부당한 대우와 시선에 타협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힘들어 적당히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며 그것을 합리화하면서 믿음의 내용을 세상의 가치관과 섞어버리는 것이었죠.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런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며, 특별히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가 다시 옛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 답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4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되었으니 다시는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가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벧전 4:1-3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사람의 정욕대로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세상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방인들, 즉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은 지난 시간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4 (NKSV)
4 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그런 지나친 방종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우리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살 때 세상은 이렇게 비방한다는 거에요. “너무 과하다, 왜 저래?, 적당히 믿어, 너 너무 이상한거 아니야?” 이런식으로 자신들의 세계와 멀어지는 우리를 비방한다는 것이죠.
그 비방이 두려워 타협할 수 도, 어쩌면 너무나 문화가 강력해서 나도 모르게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가치관과 충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워라밸? 아니, 일은 삶이다.

팀켈러는 ‘일과 영성’이라는 책에서 세계관의 충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탐구하고 일하는 분야를 포함해 사회 전반에 파장을 미친다. 이런 관점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문화적인 상상력을 장악하면 삶을 사는 방식을 큰 폭으로 좌우한다.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는 이들조차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 팀켈러, 일과 영성 중에서”
제가 이렇게 배경을 설명한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기준과 의미가 말씀이 말하는 의미를 만날때 어쩌면 불편하게 다가올 수 도 있고 너무 다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하는 문화가 너무 강력해서 나도 모르게 그 가치관을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점으로 다가올 때 큰 충돌로 내 안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삶속에서 ‘일’ 하면 흔히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워라밸’ 일과 삶의 균형 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정말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당한 쉼을 주자는 의미로 시작된 이 단어는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왜곡된 ‘일’의 기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있나요? 일은 삶이 아닌가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외치고 여기는 워라밸이라는게 어느 순간 ‘일’은 나의 삶과는 상관없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일은 나의 삶을 갉아먹는 어떤 도구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죠. 일을 안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인 것처럼 포장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가치 없는 사람처럼 여기게 되는 모습말이에요. 나는 지금 일을 하지 말고 내가 하고싶은 걸 마음껏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왜! ‘일’에 매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일에 대한 시선이 지금의 나를 가치없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이러한 결과로서의 현재 2030세대는 4050세대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최근 보도된 뉴스에는 청년 무직자가 66만명인데, 이들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굳이 ‘힘든 일을 왜 해야 하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럴바엔 워크를 버리고 내가 즐기고 싶은 라이프만 살겠다가 결론이 되어버린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겁니다.
워라밸을 외치는 세상의 가치관이 놓치는 부분이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워라밸을 외친다는 것은 자신의 일, 직장이던 학업이던 심지어 봉사던 이것들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걸 말하는 것과 같고 이 말은 곧, 자신은 지금 가치없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외치고 있는 모습과 같다는 거에요.
정말 여러분은 지금 가치없는 일을 하고 계신건가요? 만약 이 가치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에요. 왜? 모두 일을 하고 있잖아요. 학업이던, 직장이던, 심지어 신앙생활도 넓은 의미에서 ‘일’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은 삶이라구요. 그래서 ‘일’은 가치 있습니다.
창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는 ‘일’을 하시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보시며 누리시고 기뻐하시는 ‘쉼’을 가지셨죠.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자신과 같이 사람을 만드시는데, 하나님의 방식과 똑같이 살게 하십니다. 어떻게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일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잠깐의 쉼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리고 바라보는 것이죠.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며 그 가운데 ‘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은혜를 누리는 시간의 균형이 필요한 거에요.
그게 바로 우리 안에서 바로 이 ‘예배’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죠. 바쁘게 한 주를 주님의 뜻에 따라 일하며, 하루를 정해 말씀을 나누고 찬양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일과 하나님의 뜻을 돌아보는 이 ‘예배’가 바로 ‘쉼’이라는 것입니다.
‘일’은 삶에서 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면 ‘일’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축복’입니다.
어떤 피조물에게도 ‘다스리라’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다스리라’, 즉 ‘일’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는 것이죠.

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안에 질문은 이것입니다. ‘일’이 축복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형상으로서 부여하신거니까 축복인건가?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시선으로 ‘일’을 바라보고 해야하는 걸까?
오늘 말씀 시대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수고에는 대가가 따라야 했고 그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너무나 익숙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당연히 수고에 대가를 바라게 되죠. 아무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겨도 대가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안에서 불만과 불평들이 오고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교회 안에 끌고 들어오니 하나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야할 교회가 오히려 불평으로 시끄러워지고 있는 것이죠.
베드로는 편지를 보내며 공동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8–9 (NKSV)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9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무엇보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다, 사랑하면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불평없이 따뜻하게’ 서로를 대하라고 말이죠.
그리스도인의 일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의 ‘일’은 자아성취, 대가지불 등의 동기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일을 일상과 분리하고 싶은 이유, 일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이 말하는 대로, 일을 자아성취의 도구로, 내가 하고 싶은 어떤 걸 하기 위한 교환의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의 동기가 ‘사랑’인 경우에는 일이 축복이 될 수 있고,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일어나는 일들이 있어요.
그건 바로 그 전에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던게 당연해지기 시작하고 오히려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이런거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과의 통화는 몇 시간이 지나도 질리거나 힘들지 않아요. 사랑하기 때문이죠.
밤늦게, 새벽까지 전화를 하고 비몽사몽하며 일을 나가는데 몸은 피곤한데 얼굴은 웃고 있죠. 여기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쟤 연애하나보다 애가 얼굴이 바뀌었어” 라고 말이죠.
누가봐도 애가 지쳐보이는데 얼굴은 행복해보이는 뭔가 그런 말로는 설명 못하지만 짐작가는 다른 모습이 있어요.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싶거든요. 그럼 그 먼거리를 몇시간 걸려서 가는게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행복하고 가는 길동안 설레죠. 엄청 피곤하다가도 사랑하는 사람 얼굴보면 잠이 깨버려요.하지만 누가 뭘 시켜서 가는 건 10분거리도 귀찮잖아요.
그런데 감정을 뛰어넘어 진짜 ‘사랑’을 동기로 일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계세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서른 여덟해 동안 병을 앓고 있는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병 나은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병 나은 자는 나를 낫게 하신 이가 일어나 가라고 했다고 말하죠. 유대인들은 병 나은 자를 고친 이가 예수님인 걸 알고 안식일에 병고친 것에 대해 박해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일하셨습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죠.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동기로 사랑하여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을 동기로 일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어떤 문화, 관습이 스며들어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삶과 구분되는 모습들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규정이라는 것의 본 의미는 ‘사랑’을 통해 열심히 살며 일하다가 특별한 주의 날, 하나님이 안식하며 누린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나누는 ‘쉼’의 날임에도 왜곡된 가치로 바라보게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 베드로는 ‘사랑’으로 일을 대하고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도구를 주셨다.(은사)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하며 일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은사’ 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정말 다양해요. 누군가는 정말 수학적 지식이 탁월해서 그 방면에서 빛을 발하는 가 하면, 누군가는 체육, 누군가는 음악, 문학, 기계 정말 다양하죠.
또 누군가는 정말 상대의 장점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칭찬으로 힘을 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정말 잘 들어주는 분이 있어요. 또 누군가는 너무 재미있어서 같이 있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가 하면 누군가는 곁에 있으면 편안함이 느껴져 함께 있는 것 만으로 쉼을 얻는 사람도 있죠.
정말 다양한 은사들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베드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으로 일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각자가 가진 장점을 통해 사랑으로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섬김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서로를 각자가 가진 장점으로 사랑하면서 일할 때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일할 때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경험은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때 하나님이 행하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족하신 그 모습 그대로의 축복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누리는 그 기쁨을 감탄하며 함께 누리는 축복으로 ‘일’을 주신거에요.
세상은 우리의 장점으로 거래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애도 사랑이라는 넓은 개념이 아닌 육체적 만족, 감정적 만족이라는 거래로 바뀌게 하죠. 내 걸 주는게 아니라 교환 해야 하니까 행복도 잠깐 일 수 밖에 없고 그 행복은 내가 있는걸 교환한거니 완벽한 행복이 될 수 없는거에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의 은혜, 그 사랑의 감격으로 시작된 사랑은 거래가 아닌 감격과 감사의 표현이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동기로 하는 일이기에 내 장점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채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올려드리는 ‘일’

왜 일까요?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에 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는 ‘사랑’으로 일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내 안에 여전히 죄된 마음이 있어서 쉽지 않다는 거에요.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스며든 세상 가치관과 싸워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랑’으로 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으로 일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깨닫고 감사하고 다시 깨닫고 누리게되는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사랑으로 일하고 꿈을 품게 되는 것이에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일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되고, 우리는 그 사랑을 채움받으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사랑으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자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에게 ‘일’이란 하나님이 다른 어떤 피조물과 다르게 우리에게만 주신 특별한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그 안에서 채움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감사해서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먼저 누리기에 나누는 것인데도, 우리는 더 큰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축복이 여러분의 자리, 지금하는 모든 ‘일’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일을 거래하는 도구로 여기지 마세요. 일은 ‘사랑’을 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을 깨닫는 귀한 축복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일하는 모습이 우리 가까운데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에서 각자의 은사로 예배와 공동체를 섬기는 수많은 스텝들, 리더들, 엘더들, 또 소그룹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도와주고 섬기는 바로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으로 일한다고 몸이 안힘들지 않아요. 그런데 ‘사랑’으로 일하며 섬기는 모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해요.
“몸은 힘든데 마음이 너무 행복해요. 하나님은 정말 저를 너무 사랑하시는 걸 느껴요. 라고 말이죠.
저는 여러분들이 ‘사랑’으로 일할 수 있는 많은 곳에 참여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텝도 좋고, 봉사동아리도 신설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할 때 주시는 채움이 무엇인지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다른 기쁨이 있거든요. 그래서 정말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를 느끼고 각자의 삶 속에서 그렇게 ‘일’의 축복을 누리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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