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4장 14-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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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엘이 되어주신 하나님
고엘이 되어주신 하나님
마지막 집회이니깐 오늘 집중하고, 뜨겁게 예배를 마무리 하도록 하자.
가족을 잃어버린 나오미, 나오미는 오늘 본문을 보면 아기를 품에 안게 된다.
이 아기는 원어로 옐레드인데, 보통 아들이라 하면 벤을 사용한다. 그런데 옐레드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룻기의 핵심적인 메세지가 드러난다. 서두에 두 아들을 잃었다는 문장에 사용된 단어는 옐레드이다. 그리고 품에 안게 된 것도 옐레드이고, 남은 단어는 모두 벤을 사용하였다.
즉 룻기의 메세지는 아기를 잃어 노년에 기쁨도 없고, 생명도 없던 나오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기를 다시 품에 안게 되고, 여자로서, 그리고 노년의 봉양자로서 삶의 목적을 갖게 된다.
전날 집회 때 회중들과 나눈 이야기 중에 고난을 당한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나누었다.
나오미는 믿음이 없어보이는 사람인가?
나오미는 약속의 땅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해를 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룻기 자체에서는 고난을 당한 나오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아기를 잃은 노년자에게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과 이방인 룻을 통하여 아기를 품에 안게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이제 나누어보자. 고엘이 되어주신 하나님. 왜 주제가 고엘이 되어주신 하나님일까?
고엘은 기업 무를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법을 알아야 한다.
아내가 있다. 아내의 남편이 죽었다. 그런데 아들은 남아 있다. 이는 기업(유산)을 상속 받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있고,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게 된다면 기업을 이어 받을 자가 없게 된다. 그럼 그 땅의 소유는 나중에 누가 될 것인가? 아무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법은 형제의 땅을 뺏거나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게 기업 무를 자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는 친가의 형제만 해당한다.
하나님이 주신 법인데, 친가인 형제가 해를 당해 기업을 받을 자손이 없을 시에 대신하여 기업을 받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업을 받아준다는게 기업 무를 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다. 대신하여 유지비를 지불해주며 해를 당한 가족이 기업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다.
즉 기업 무를 자는 서비스 정신만이 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거절할 수 있다. 우선권에 대하여는 장남부터 시작해서 거절하면 그 아래 순 대로 내려가며 기업 무를 자가 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기업 무를 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과부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법이다.
자 그럼 본문에 나오는 첫 기업 무를 자는 아무개로 소개가 되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업 무를 자가 되려고 했다. 나오미는 노년자라 아이를 갖을 수 없고, 아무 가치도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있기에 기업 무를 자가 되고, 나오미의 상속된 땅을 모두 가지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의 존재를 알린 후에 그는 발뺌을 했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젊은 과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장성하고, 그 기업을 룻의 아들이 갖게 되겠지?
이를 안 아무개는 발뺌을 한다.
보아스는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듯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가정을 자신이 책임질 것이고, 게다가 상속 받을 수 있는 아이까지 약속을 한다.
우리 친구들도 잘 알겠지만 하나를 가꾸고 키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자녀를 낳아보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내 삶을 가꾸고 밝은 미래를 향해 건설해 나가는 것이 쉬운가? 나 자신 하나 키우는데도 정말 쉽지 않은데 두 과부와 앞으로 낳을 아이까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말한 보아스의 고백은 정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할 수 있다.
그런 보아스는 자신의 신을 벗어 장로들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인으로 선다.
신발을 사람들 앞에 벗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모스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난한 자가 신발 한 켤레에 팔린다.(암2:6, 8:6)
신명기에서는 그 자신의 형제의 기업을 물려받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그 자의 신발을 빼앗아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신발을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하라 말씀하고 있다(신 25:7-10)
결론적으로 신명기나 아모스에서는 기업 무를 자에 관해서 신발을 강제로 벗김 당하며 수치스러운 일로 나타나고 있지만, 반면 보아스는 그 수치를 공의와 정의로움으로 형제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돌아와서
나오미가 받은 아기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다. 삶에 소망이 없고, 죽은 자와 같은 노년자였으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순종하는 보아스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림 받은 자가 되었다. 이는 마치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라고 말하며 원망하는 듯한 나오미의 고백이 숙연해지는 듯한 반전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
보아스가 지킨 법은 하나님의 법을 지킨거였어요.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보는 분이에요. 보아스는 마치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듯 고난을 당한 나오미의 삶을 생명으로 이끌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큰 충격은 그 아기는 평범한 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아기는 다윗의 할아버지였다.
사무엘상 17:12)을 보면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더 큰 충격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란 문장이 어디서 본듯한 문장이 아닌가?
이는 룻기 1:2)에 나오는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문이었다.
여기서 룻기의 한가지 주제가 더 나온다.
유다 가문이 무엇이길래 왜 룻기에는 유다 가문이 고난을 당했는가?
왜 유다 가문을 통해서 다윗이 나왔는가? 그리고 왜 예수님이 유다 가문을 통해서 탄생하셨는가?
이는 창세기에 유다가 야곱에게 받은 축복에 관련이 있다.
창 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왜 이런 축복을 받았냐면, 유다가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담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모습은 자신의 형제를 살리기 위한 보아스를 보여주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모습을 예고해주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계획이 가득하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중고등부 친구 여러분.
하나님은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 이전부터 일하고 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너희들의 마음이 어떻던, 어제 어떤 은혜를 받았건, 어떤 기도를 했던간에
너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