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 골로새서 3:12-15 2023 새순교회 여름 수요강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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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수요강론 시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시간 허락하심 감사합니다. 이 세상 그무엇보다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가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정체성을 죄인에서 새 사람으로 바꾸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이 말씀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시간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12-15 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수요강론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은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옷은 우리의 신체를 가려주는 역할도 하고 멋을 내기 위해 각양각색의 옷을 입기도 하지만 때론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학생이면 교복을, 소방관이면 방화복을, 군인이면 군복을 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옷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방화복을 입은 소방관은 화재 진압과 구조를 해야 하고, 군복을 입은 군인은 경계 근무를 서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옷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것입니다. 학생이 담배 피거나 술 마시거나, 소방관이 불이 났는데도 화재 진압하지 않거나, 군인이 적이 쳐들어왔는데도 방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옷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며 비난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에 대하여는 죽고, 새 사람에 대하여는 다시 살아난 결과로 하늘의 것을 구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12절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에서 나타나야 할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그 모습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평강이 나타나야 함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요점1] 먼저,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야 할 모습은 ‘서로 용서하는 모습’입니다.
[설명부] 13절에서 바울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용서하되”라고 말합니다. 13절의 ‘용납’과 ‘용서’는 앞 절의 ‘옷 입으십시오’의 결과들입니다. 바로 새 사람의 옷을 입었다면 ‘용납’과 ‘용서’라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에 불만이 일어날 때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결과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13절에 등장하는 ‘불만’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불만은 주로 상대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불만이 생길 때 처음에는 참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말과 행동이 반복될 때 우리의 불만은 점차 쌓여가고 결국 불만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만 표출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관계도 틀어집니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을 우리가 용납하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래 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로 용납하라는 말과 함께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피해를 봤는데 내가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 이것은 손해 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손해 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 뒤에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사람이 왜 불만 있는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지 이유를 덧붙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다시 말해 “너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셨으니 그분의 용서를 따라 너희도 용서해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바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죄 있는 우리에게 불만을 표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너희 왜 내가 싫어하는 죄를 가지고 있느냐? 왜 내가 싫어하는 죄를 자꾸만 짓고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불만을 표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불만 표출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용서를 표출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불만이 있지만 용서하라는 말의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증명부] 비슷한 본문인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라고 말하면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적용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불만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순간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보기 싫은 행동을 하는 사람,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았으니 보는 관점과 행동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상대는 나에게 선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거나 관계를 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새 사람의 옷을 입었다는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은 공부로, 방화복을 입은 소방관은 화재 진압과 구조로, 군복을 입은 군인은 경계 근무를 서는 것으로 각자의 옷에 맞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용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본성은 이것을 거스르려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당했는데, 왜 손해를 봐야 해?”라며 용서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용서를 기억하면 됩니다. 그분은 죄인인 우리에게 불만을 표출하실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아니라 용서를 표출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내가 손해 본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기억하며 불만 있는 상대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전환요소] 바울은 이 용서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용서와 평강에 온전함을 이루는 사랑의 띠를 매라고 덧붙입니다. 그렇다면 이 온전함을 이루는 사랑의 띠가 무엇일까요?
[요점2] 두 번째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는 사랑의 띠를 매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설명부] 14절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시작합니다. 원래 원어는 “이 모든 것들 위에 사랑을!”이라고 사랑을 강조하는 형태의 불완전한 문장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3장은 계속해서 ‘옷’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문맥상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라는 완전한 문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바울은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용서의 모습을 나타내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의 차이는 기독교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 다른 종교에서도 사랑을 가르치던데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사랑을 알고 계시고 경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이 믿는 신은 ‘알라’입니다. 이 알라는 자기 자신만 있는 독자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이 알라는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위해선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리브스라는 신학자가 쓴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이런 신은 인간에게 의존적인 신이거나 인간을 만든 이유는 인간을 사랑하진 않고 그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쳐 자신이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기 이전부터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진짜로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도 삼위 안에서 누리고 계시던 그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 골로새교회에게는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바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쳐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골로새교회를 향해 바울은 “긍휼과 자비라는 속옷, 겸손과 온유라는 셔츠, 오래참음이라는 슬랙스를 입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이라는 겉옷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사랑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14절 뒤에서 바울은 이 사랑이라는 겉옷은 “온전하게 매는 띠”이기 때문에 입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띠”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어떤 사물을 하나로 묶는 연합이나 결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12절에 나온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이라는 이 모든 덕목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증명부]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로 사랑 안에 이 모든 덕목들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이 모든 덕목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설명부] 더 나아가 이 ‘띠’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한 몸으로 묶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띠’가 2장 19절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띠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을 하나로 묶으며, 오늘 읽은 본문인 15절에서는 “너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하는 것으로 ‘띠’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한 몸으로 묶는 의미를 지지합니다.
[증명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한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실 때도 이 ‘띠’가 등장합니다.
[설명부] 다시 말해 이 ‘띠’는 모든 덕목들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골로새성도들을 완전한 한 몸으로 묶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불만 있는 사람을 완전하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범죄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교회의 하나 됨도 없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긍휼히 여기고 자비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을 때 교회를 하나의 완전한 공동체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이라는 겉옷을 입어 완전해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적용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만 있는 형제가 있습니까? 용서를 넘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으면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완전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만 있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는 할 수 있다고 쳐도 사랑까지 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골로새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듯이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형제를 완전히 용서하고, 사랑하며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전환 요소] 이상 우리는 새 사람의 옷을 입었다면 용서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고 사랑의 띠를 매야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공동체를 하나로 만듭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용서하면서, 더 나아가 사랑함으로 한 몸을 이루게 만듭니다. 바울은 그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요점3] 마지막으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에게는 평강이 나타나야 함을 살펴보겠습니다.
[설명부] 15절 상반절을 보시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문장의 더 정확한 번역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게 하라”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골로새교회가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한 몸을 넘어 ‘평강’, 즉 평화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라는 소유격의 말이 그리스도라는 유형의 평화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헬라어 문법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평화 또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시는 평화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바울의 명령을 다시 정리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로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용서와 사랑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했듯이 여기서도 평강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합니다.
다른 어떤 평강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이 때 로마는 세계를 제패하여 로마를 이길 국가가 없으니 로마에게 평화가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평화는 크게 두 가지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군사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이룬 평화이기에 로마의 군사가 약해지고 로마도 정복을 당한다면 다시 깨질 평화라는 점과 이 평화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라는 관계만 있을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한 몸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Pax Christi’, 즉 그리스도의 평화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닌 사랑에 의한 평화를 이루십니다.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용서와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용서와 사랑 위에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이루십니다. 이런 평화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가 아닌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 평화이며, 결코 깨어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한 몸이 되었으니 어느 몸의 한 구석이라도 아프게 된다면 몸 전체가 아픈 것처럼 몸의 마디 마디가 연결되어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관계인 것입니다.
[증명부] 요한복음 14:27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은 이 세상의 평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가져다주는 평강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로마에 반대하는 반제국적 평강을 넘어서서 그것을 초월하는 초제국적인 평강입니다.
[설명부] 더 나아가서 한 몸된 우리의 머리가 누구이십니까? 골로새서에 따르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1장 18절을 보시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장 19절에서는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영양분을 공급받아 우리는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니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서도 임하는 것입니다.
이 평강을 위해 골로새교회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적용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라는 한 몸인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으로 한 몸된 우리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많아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높은 사람이 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사라질 것들이며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돈이 더 필요하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부추기기만 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평강이기에 다른 사람과 한 몸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누리는 평강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좋은 집, 좋은 차, 많은 재산 등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은 다릅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공급하십니다. 우리가 돈이 많지 않아도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좋은 집, 좋은 차를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평강이기에 우리는 그저 평강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아주 재산이 많았던 부자였습니다. 그는 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동족에게서까지 돈을 뜯어내어 재물을 모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재산은 많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무엇인가 허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그가 있는 마을로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재산을 모아 많은 재산으로 평강을 누리려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로 그의 마음을 다스리던 돈의 평강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바뀌었고 돈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한 평강인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기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여도 괜찮아졌습니다.
이전에는 평강을 누리기 위해 동족을 팔면서까지 아등바등 재산을 열심히 모아야 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평강을 주시기에 평강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더 나아가 삭개오는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며 살았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다른 사람들과 한 몸이 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3.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새 사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야 할 모습은 용서이며 온전함을 이루는 사랑의 띠를 매라고 골로새교회에게 말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불만 있는 형제를 우리가 용서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완전한 용서와 완전한 한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되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가져다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에게 가득하게 되길 소원하는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두고 한 가지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죄인에서부터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에게 나타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용서와 사랑, 그리고 평강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며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까? 우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평강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평강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평강을 누리게 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으로 오늘 모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