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 극복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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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기도는 하나님의 관계의 표징이자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은 현세에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마가복음을 항상 읽으실 때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기적들도 모두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임하신 예수님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변화산 밑으로 내려오니 지금 나머지 제자들과 시기관들이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변화산 위와 변화산 아래가 대조되는 모습이죠. 변화산 위는 영광이었지만, 변화산 아래는 제자들이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서기관들이 비난했고, 제자들은 변명하고 있었습니다. 변화산 아래가 얼마나 처참한 상황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같은 팔레스타인 지방이지만, 변화산 위와 아래가 이렇게 다릅니다.
우리의 우둔함은 어디에서 오냐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변화산 아래로 공간이 전환되면,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내가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비판을 받을 때 말이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된 모습을 왜 부활하실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는 변화산 위와 아래가 구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변화산 위와 아래, 이스라엘 안과 밖, 유대인과 이방인, 선과 악, 성과 속, 정결과 부정, 하늘과 땅, 이러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그들의 뼛속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변화산 위의 영광이 온 세상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세상이 변화산 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은, 변화산 위가 아래로 임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겁니다. 이원론이 파괴되는 순간이죠. 제자들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예수님은 아마 제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을 겁니다.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구분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팽배한 세속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도 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고방식에는 이원론이 있습니다. 물론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상적 운동이 있습니다만 인간은 이런 사고 방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면 죄가 없어야 하고, 선과 악이 공존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이것을 극복합니다. 죄악과 하나님 나라는 공존할 수 없는데, 죄악 가득한 세상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십니다. 오히려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이걸 증거하는 것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인데요, 제자들이 그 아이를 못고쳐서 예수님이 고쳐주시죠.
제자들은 왜 그 아이를 못고쳤을까요? 제자들이 스스로의 무능함에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몇일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고쳤는데, 그렇지 않은 나의 모습에 답답해했기 때문이에요. 영적인 무기력함이 찾아온 것이죠.
제자들이 선교 나가서 능력을 행했을 때 자신에게 특별한 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역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예수님 따르길 잘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능력이 없어진 것을 보고 의심이 들고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능력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지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능력이 없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기도’란 단순히 기도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내가 하나님과 접붙인 관계라는 것 나타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보기로 귀신 들린 아이를 살리신 것인데요, 이 아이와 이 아이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귀신을 쫓는 게 가장 중요했지, 그 아이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지 전혀 그런 정황이 나오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역사하신 거예요.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예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원론이 깨지는 순간이죠.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시청각 수업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의 마음과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내가 영적으로 무기력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이죠. 이원론을 깨는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래서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내게, 그리고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절대 믿을 수 없는 복음을 믿는 믿음을 내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50절 읽어보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금이 맛을 짜게 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무기력해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계십니다.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이 지금 이 시간 드리는 기도는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증거입니다. 열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접붙인 관계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힘겨워서 답답하고 무기력해지더라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좌절하지 마시고 담대히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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