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불평불만을 마음껏 털어놓으십시오. 그러나…

예레미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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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불평불만을 마음껏 털어놓으십시오. 그러나…
최근’킹더랜드’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인공이 호텔 아들인데 그 아들이 트라우마처럼 싫어하는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웃고만 있는 것입니다.
어릴적 자기 엄마가 사라졌는데도 모두 웃으면서 자신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저렇지 않나 묵상해 봤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친구중에 한명은 길을 가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려 핸드폰이 깨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억지로 웃으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핸드폰이 떨어져서 깨졌는데도 ‘주님, 핸드폰이 깨졌지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만 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 과연 험한 세상 속에서 감사만하며 살아갈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는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의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가 어떻게 이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레미야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예레미야 11장부터 20장까지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고백이 다섯번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 두번째 고백입니다.
첫번째 고백은 지난주 설교한 부분입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고향사람들, 가족들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서도 계속되는 핍박과 고난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첫번째 고백보다 더 괴로워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레미야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것일까요?
10절입니다.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예레미야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같습니다.
엄마보다 더 먼저 예레미야를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불평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온 세상이 자신한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마치 빚쟁이처럼 자신을 뒤쫓아오고 괴롭히고 저주합니다.
이런 마음이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온 세상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 두려움에 빠집니다.
물론 그들은 예레미야처럼 실제로 그런 일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상태만큼은 비슷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참 예언자에게 우울증이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이런 상태까지 갔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입니다.
제 주위에는 목회자인데도, 선교사인데도 우울증에 걸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왜 우울증에 걸렸을까요?
기도가 부족해서? 아니면 믿음이 약해서 일까요?
그런 분들을 우리가 쉽게 판단할수 있을까요?
그들의 상황과 상태를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말할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우울증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먼저 예레미야를 위로해 주십니다.
11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를 강하게 해주고, 네가 복을 누리게 하겠다. 네 원수가 재앙을 당하여 궁지에 빠질때에, 그가 너를 찾아와서 간청하게 하겠다.
주님은 또다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를 강하게 해주셔서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복이란 그를 보호해주셔서 사명을 잘 마칠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저주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와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저주를 퍼붓던 그들은 예레미야를 찾아와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레미야가 참 예언자임이 증명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고통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개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도 괴로운 상황 그 자체보다 더 큰 고통은 그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수 없을 때입니다.
15절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시니, 저를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십시오.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주님께서 진노를 오래 참으시다가 그만, 저를 잡혀 죽게 하시는 일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때문에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아 주십시오.
이 말은 이런식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이렇게 제가 힘든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빨리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제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이렇게 가다가는 제가 죽고 말겠습니다. 왜 저를 부르셔서 이런 사명을 맡기셨습니까? 주님이 안 부르셨다면 그냥 편하게 살았을텐데 이게 뭡니까?”
예레미야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 지체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있지만 그 응답을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심지어 아무런 사역의 열매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괴로움은 더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현실속에 있습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실일지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좀 낫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가족들조차 자신을 버렸기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을 의지할수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장 자신을 구해주시거나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세상에 버려진 것같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6절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 전하는데서 그친게 아닙니다.
그는 그 말씀을 묵상하여 자신의 삶으로 내면화 했습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그런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고난가운데서도 견딜수 있는 힘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고, 사역의 열매가 없자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묵상하던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17절입니다.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어울리는 자리에도 끼지 못합니다.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면서 사람들과 웃고 떠들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와 함께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레미야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기뻐해야 하는 친구의 결혼식장에는 갈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가족들, 친구들과 기쁘게 어울렸지만 이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런 모든 일상의 기쁨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불만은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의 불만은 이것입니다.
이런 대가를 치루는데도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의 고통은 그치게 해주시던지, 악인들 몇명은 벌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런 불평불만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일까요?
어느 순간 주님을 위해 치룬 희생과 대가가 이제는 자신의 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하나님을 향한 불평불만은 더욱 커져 버리고 맙니다.
거의 선을 넘어갔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18절입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합니다.
왜 고통은 그치지 않는지, 왜 도와주시지 않는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님께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름철 시냇물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와디(wadi)라고 부르는 지형을 말합니다.
평상시에는 마른 지역인데 우기에만 하천이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다시 마른 지역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수시로 변하는 이 와디에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셨는데 자기가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아니라 왔다갔다하는 변덕스러운 하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할때는 와디처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분이라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언자인 예레미야가 이런 불평을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가려하지 이건 거의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도저히 믿을수 없는 분이십니다.
혹시 사기꾼 아니십니까?
이렇게 우리가 기도할수 있을까요? 아니, 기도해도 될까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주님께는 어떤 불평, 불만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감사와 회개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과연 그것이 건강한 신앙일까요?
다윗의 시편을 보십시오.
시편 4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왜 자신을 버리셨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보이지 않을때 그는 괴로워하고 낙심하며 부르짖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기 3장에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인 니느웨를 살려주시자 하나님의 성품을 비꼬면서 원망합니다.
예, 역시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시는 그런 분이죠…예, 예
이제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예언자지만 그는 주님께 계속해서 불평,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다윗도, 욥도, 요나도, 예레미야도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그게 바로 자신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지 않을때 내 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불평불만까지도 솔직히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3,4학년때 학교 과제보다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예배를 3년간 개근했습니다.
목사님이 시키는 것이면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순종했습니다.
그러다가 4학년 2학기가 되었고, 취업을 할때가 되었습니다.
그 때 제 학점은 어중간한 상태였고, 토익점수도 어중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실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졸업전에 대부분 취업을 했는데 모두 취업할때 저만 취업하지 못했습니다.
졸업식때가 되면 취업한 애들은 축제분위기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우울한 분위기 였습니다.
저는 취업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부모님이 오셨지만 우울했습니다.
부모님께 많이 죄송했습니다.
부모님께 떳떳하지 못한 모습으로 졸업 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제 아내도 알지만 그 시절이 제게는 참 혹독한 시절이었습니다.
주님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고, 괜히 열심히 했나 후회도 했습니다.
그럼 결국 제게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엄청 좋은 회사에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졸업한지 6개월이 지나서야 원하지 않던 회사에 겨우 취업할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 저를 향한 주님의 놀라우신 뜻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너무 힘들었고, 저는 참 주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평불만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불만으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의 불평불만에 대해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19절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된다.
고통가운데 불평불만하는 예레미야에게 이번에는 주님이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던 예레미야가 이제 오히려 회개해야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계속된 고난과 하나님의 무응답은 그를 깊은 절망으로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예레미야가 해야할 일은 주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예언자로서 아무일도 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언자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를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고통가운데 힘들어하는 그를 왜 위로해주시지 않고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19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지금 사람들의 회유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여기고 기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계속되고,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자 낙담했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협박과 회유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에게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들어야지, 왜 네가 사람들의 말을 듣냐’고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더이상 불평불만의 천박한 말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던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불평불만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불평불만을 계속 내버려두면 그것이 어느 순간 불신이 되어 우리를 넘어뜨릴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예레미야와 다를까요?
만약 우리에게 고난이 계속되고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 지체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열매도 없다면 어떨까요?
그 순간 충분히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수 있습니다.
스스로 합리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핑계거리를 만들어 사명에서 도망칠수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수 있을까요?
또다시 소망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도 건져내고, 잔악한 사람들의 손에서도 구하여 내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강하게 해주셔서 백성들과 맞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어느 누가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놋쇠 성벽처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함께 하시고 그를 도우시고 그를 악인들에게서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처음 부르실때 하셨던 약속입니다.
물론 또다시 하나님의 약속일뿐입니다.
하나님이 곧바로 예레미야에게 응답하지 않으실수 있습니다.
그는 더 견뎌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을 견딜수 있는 힘은 오직 소망과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중에 천로역정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절망거인 이야기입니다.
크리스천과 소망 두 사람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의심의 성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에는 절망거인과 그의 부인 자포자기라 불리는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붙잡힌 크리스천과 소망을 매일마다 때리고, 협박했습니다.
그들이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너무나 절망하여 정말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크리스천을 붙잡아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옆에 있던 소망입니다.
소망은 무너진 크리스천을 계속해서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천은 자신이 잊고 있던 약속이라는 키를 품 속에서 꺼내 의심의 성을 탈출할수 있었습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부조리한데, 하나님의 정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은 너무 지체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답답한 마음과 불평불만을 주님께 털어놓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불평불만이 불신으로 부패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이 때 연약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은 다시 한번더 우리에게 소망과 약속을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때로는 내 머리로 도저히 주님의 뜻을 이해할수 없는 상황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의 소망과 약속이 있다면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할수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저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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