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5 양청] 32-33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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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가 칭의교리가 교회가 서고 넘어질 수 있는 교리라고 했다. 그정도로 칭의교리는 중요한데, 여기서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겠지만 오늘날 칭의교리는 개신교 안에서도 대단히 공격을 많이 받고 있다. 이를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영국의 톰 라이트같은 경우 칭의론이 교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루터나 칼빈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여겼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 신학자들과 현대 영국 유학하고 온 목사님들도 이 부분에 대해 영향을 받아서 칭의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따라서 오늘 이 부분을 잘 공부해야 하겠다.
32문.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금생에서 어떤 유익에 참여합니까?
답.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칭의, 양자됨, 성화 그리고 금생에서 이것들에 동반되거나 이것들로부터 나오는 여러 유익에 참여합니다.
33문. 칭의란 무엇입니까?
답. 칭의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 하나님은 칭의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데, 오직 우리에게 전가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주도적인 활동이라 했다. 구원론이 성령론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조건이나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주도적인 활동이고, 이 모든 요소들 중 하나라도 빠진 것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칭의, 곧 의롭다고 여겨주셨는데 성화가 없다면 이를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성화도 시켜주셨는데 양자됨, 곧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구원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칭의도 되고 성화도 되었는데 영화, 곧 구원의 완성이 없다면 이 또한 완벽한 구원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모든 요소들이 모두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뤄가신다는 것이다.
33문을 보라. 칭의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라 말한다. 만약 선생님이 시험을 보면서 상을 주겠다 했다. 그런데 시상을 1등을 주겠다는게 아니라 그 기준을 선생님 마음대로 하겠다고 했다. 이럴 때 학생들은 반발을 할 수 있다. “아니 선생님 1등을 줘야죠!”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 돈으로 자기가 세운 기준에 의해 시상을 하겠다 하는데 학생들은 그 조건을 자기 안에서 찾는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이다. 칭의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라고 하실 때, 이러한 법칙에서 하나님께서 초월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기준이 되신다 한다. “하나님, 저 사람은 너무나도 선한데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라서 우리가 이 은혜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롬11:33 “깊도다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감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34절에도.. 하나님을 누가 설명하고 ... 이것이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5절.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빚진 존재로 만들어서 반드시 나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하는 존재로 만들 자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귀면서 가장좋은 방법은 맛있는 것을 주거나 선물을 주면 그것만큼이나 마음이 열리는게 없단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조건을 만들 존재가 없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제가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저에게 잘해준다 생각해보라. 그러면 더 싫어지지 않던가? 가뜩이나 싫은데. 싫은 정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던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조건을 만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주권에 따라 은혜로 하신다 했다. 교리에서도 주권이라는 단어에 대해 배우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표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행하신다. 교리를 제대로 배우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모를 때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가?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왜? 라는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제일 어려운 것이 어떤 분이 목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나에게 행하시는지 모르겠다 하면 대답하기 참 어렵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의 짧은 소견으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인가, 하나님께서 진정 나의 유익을 위해 이렇게 인도하시는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좀전에 읽었던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의 주권이 나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신다는 것.
근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가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인도에서 선교를 할 때에 인도어로 성경을 번역하던 원고덩어리가 인쇄소가 불타면서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돈벌자고 번역한게 아니다. 내가 유명해지기 위해, 내 명예를 위해 한 것도 아니다. 그가 낯선 인도 땅의 수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번역했겠는가? 그런데 그 모든 원고가 불에 타버렸다. 그야말로 망연자실하고, 좌절할 만한 상황이다. 그 때 친구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많이 마음이 힘들지만 내가 낙심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만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게서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행하셨으리라 생각한다 고백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시는, 거룩하시고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는 다른 그분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뜻에 기초한 행위.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칭의는 용서이다. 칭의는 내 죄의 기록과 내 죄에 관한 모든 것을 지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과는 과거의 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칭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를 받을 때, 세례라는 의식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내가 20살에 세례를 받았다면 20살 이전까지의 죄를 용서하셨다는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까지 다 용서하셨다는 것이 칭의이다. 복음을 떠나서는 이런 개념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한다면 회개는 왜 하는가? 여러분이 회개할 때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하는가? 하나도 안빼놓고 다 회개하며 사는가? 만일 회개하지 못한 죄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은 후에 연옥에 가서 그 죄값을 다 치러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면, 그 용서의 근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속죄가 일어났다. 그것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일 때 나에게 적용된다. 이는 내가 예수를 영접할 때 내 안에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속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죄를 자백함, 죄를 고백함이 회개인데, 우리가 죄를 생각할 때 예수믿는 자의 죄와 예수 안믿는 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신자의 죄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죄이지만, 예수 믿는 자의 죄는 지옥형벌에 처해지는 죄가 아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아버지께 자백함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이고, 속죄의 은혜가 나에게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가 없으면 관계 회복이 안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처음과 끝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 것,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삶 속에서 의로워져서 죄를 짓지 않고 죄로 넘어지는 그런 삶을 사는게 아니다. 넘어지고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보신다는 것이다. 의롭다 선언하셨다. 여러분, 모든 종교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봐야 답을 안다고 한다. 알라를 믿는 무슬림은 마지막 날에 저울에 선행과 악행을 저울질 해서 선행이 무거우면 천국이고 악행이 무거우면 지옥이라 한다. 그것을 마지막 순간에 안다. 이것이 세상의 종교이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은 처음에 선언을 한다. 처음에 심판이 일어난다. 처음에 심판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나? 하나님이 끝까지 보시다가 천국에 이른 자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부어주시는게 아니다. 처음에 심판을 하시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복을 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내가 예수 믿는 순간 무한한 복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에 우리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는가? B를 보라. “칭의의 소극적 요소”가 있고 C를 보면 칭의의 적극적인 요소가 있다. 소극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죄책을 해결하시는 것, 죄값을 지불하시고 죽으신 것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죄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내가 죄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죄인인데 죄인의 딜레마는 뭔가 하면, 1. 죄값을 치러야 한다, 2. 죄값을 치루고 나는 벌을 안받아도 될 사람이 될 뿐이지 구원의 상급을 받을 수는 없기에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어야 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예수님게서 죄값을 치루셨다(수동적 순종).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강조하지 않는다. 어느 수준에서 주님이 율법을 지키셨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이를 통해 첫 사람 아담이 실패했던 완벽한 율법의 의를 얻으셨다.
그리고 그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해 주신다. 우리의 죄값을 대신 받으신 것은 수동적인 순종이다.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것은 능동적인 순종이다. 그래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것이다. 슥3:1을 찾아보자. “대제사장 ....” 하나님의 심판 법정을 보여준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법정 앞에 피고인으로 서 있다. 천사들이 증인이다. 사탄이 오른쪽에 서 있다. 대적하려고. 숨겨진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서 고발하는 검사이다. 그런데 2절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데 우리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 상징적이다. 더러운 옷을 입고 설 수 밖에 없다. 걸레 같은 옷이다. 여호수아가 그런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다. 그런데 4절을 함께 읽어보자.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다 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값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옷,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없는 의로움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가 라고 하는 말을 이해 잘 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겐 없던 의를 얻으셨다. 이 의를 우리가 어떻게 전해 받는가하면,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서 그분의 의가 내 것인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가라는 말이다. 실제로 내 것이 아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님에도 그분의 것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의 경우는 다르게 설명한다. 칭의가 아니라 성의를 말한다. 성의는 이룬다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행위구원을 말한다. 주님이 이루신 의인데 마치 내 것처럼 나에게 정당화되는 것이다. 교재의 B를 보라.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주입이 된다고 한다. 이는 전가된다는 말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그게 나에게 내 것이되어 내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무얼 통해? 성례를 통해. 그러니까 로마카톨릭은 사제(신부)가 왕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제 혹은 신부가 성찬식을 베풀 때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신부가 성찬식을 베풀면 내가 믿음으로 그걸 받지 않아도, 내가 그걸 대충 받거나 아무 생각 없이 받아도, 그걸 대충 먹고 하찮게 여겨도 그것이 나에게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력적이다. 사제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라고 선언하면 이 떡이 진짜 예수님의 살로 변화되고 그 살을 내가 씹어먹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부가 준 것을 먹기만 하면 자동으로 은혜가 나에게 들어오고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들어온다. 세례를 베푼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신부가 세례를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던 안믿던 세례만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세례 자체가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고전 영화들 중에 이탈리아 마피아 영화들이 있다. 그들은 밥 먹듯 사람들을 살해한다. 온갖 마약과 살인을 저지른다. 그래놓고 성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 그리고 다시 밥먹듯 살인과 마약을 저지른다. 그리고 또 고해성사를 한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고해성사를 사제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에 효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편에서는 이것만큼이나 편한 구원이 없다. 내가 믿음이 있건 없건, 내가 거룩한 의지로 죄를 멀리 하고 의를 향하여 가던 말던 아무 상관없이 그냥 사제가 주는 떡만 받아먹으면, 사제가 주는 세례만 받으면 구원은 따논 당상이니 얼마나 편한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카톨릭의 성의 개념은 이 은혜가 내 안에서 역사하면서 내가 선행을 하게 만든다. 결국 선행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내 공로이다.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성인이라 부른다. 성인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의가 전가되는게 아니다. 이 의는 100% 무결점 완전한 의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의, 의를 전가받는게 아니라 의를 이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죄인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의가 100이라고 한다면 성인들은 의를 하도 많이 이루어서 예를 들어서 의가 1000이 있다. 그들 자신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100을 제외하면 900의 의가 남는다. 100의 의를 필요로 하는 9명을 구원할 수 있다. 9명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의를 90 정도만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의는 10이다. 그렇게 따지면 10의 의를 필요로 하는 90명을 구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축적하고 이룬 의를 남에게 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성 안나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성베드로여!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부르짖는 것이다. 그들의 공로가 나에게 주어지도록. 그래서 그들은 성인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인구비례가 좀 이뤄지지. 그래도 안되니 연옥에 보내서 좀 혼좀 내고 천국에 가도록 만든다. 이런 식으로 종교적 체계를 만들어냈는데, 칭의라는 것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사법적 선언인데, 이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의를 이루어가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성례가 강조된다. 이것들은 종교이다. 이것들로 기독교 복음이 쇠퇴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종의 멍에를 맬 수 밖에 없다.
이신칭의라는 말은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우리 교재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했다. 이 모든 구원의 은혜는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다. 33문의 답을 보면 “전가된다”, “받아들여진다” 라는 표현이 있다. 모두 수동태이다. 내가 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를 이루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나에게 받아들여지고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B를 보라.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 도구이다. 믿기 때문에 의로워지는게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지는 것이다. 2주 전에 질문했다. 선생님이 나에게 이메일을 통해 답을 알려주셨다. 내가 답을 아는 원인이 무엇인가? 선생님인가 이메일인가?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이메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알려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그런데 무엇을 통해서 그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믿음을 통해서이다. 우리 구원의 원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짊어지셔서 의를 이루셨는데, 이를 성령께서 나에게 나의 의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적용이다. 사람이 이룬 구원은 불확실한 구원이지만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이루셨으며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구원은 실패할 수 없고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구원을 붙들고 가신다. 때로는 내 눈의 눈물이 마르고, 때로는 기도도 잘 안되고, 때로는 내 마음이 낙심하고 시험이 들 때가 있는데, 내 상태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늘상 불안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으니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안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니 확실하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의 구원이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롬3:27-28의 말씀을 찾아보자. 우리의 구원이 내가 율법을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뭔가 순종해서, 내가 뭔가 행해서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가 본래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으로 거져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 공로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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