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에 대한 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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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할 경우에 주어지는 조건적인 축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이 시간 축복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았고요. 오늘은 저주에 관한 말씀을 살펴볼텐데요. 본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구조를 살펴보면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전체 분량에서 축복과 저주에 대한 분량이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레위기 26장 3절부터 13절까지는 축복에 관한 말씀이 등장하고 이어서 14절부터 46절까지 저주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절수로만 보면, 축복은 열 한절, 저주는 서른 세 절 분량입니다. 저주에 관한 말씀이 축복에 관한 말씀보다 세 배 가량 많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레위기 26장 말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분량 차이는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이왕이면 저주보다 축복이 훨씬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분량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절수로 따졌을 때 세 배씩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마음이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내용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악인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저주는 사람의 불순종하는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 인생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주는 축복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습니다만,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불순종했을 경우에 받는 저주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저주의 서론은 14절에서 16절 말씀에 등장하는데요. 14절 말씀 보세요.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을 불순종했다고 판단하십니까? 청종하지 않는 것.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것. 또 15절에 보시면, 내 규례를 멸시하는 것.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싫어하는 것.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않는 것.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불순종했다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15절에 “싫어하여”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말로 “싫어하여”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는 단순하게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싫어하는 정도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혐오하다”라는 말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저주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말씀을 지키기 싫다고 딱 한번 표현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혐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혐오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혐오심이 뿌리 깊게 잡혀 있어서 쉽게 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이 모든 것을 혐오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어떤 저주를 내리시는가 하면, 16절부터 39절까지의 굉장히 많은 저주의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오늘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저주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저주는 질병입니다. 16절 말씀 보세요.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여기서 놀라운 재앙이라는 말은 갑작스러운 재앙 또는 예기치 못한 재앙이라고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또는 예상하지 못했던 질병에 걸린다는 것인데, 저주로 인한 질병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호흡기 질환부터 시작해서 열병이나 시력 감퇴 등을 통해서 기운이 없어지고 점점 더 수척해지면서 생명력이 꺼져가게 됩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두 번째 저주는 약탈당하는 것입니다. 16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짓고 노력해도 그 열매의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열매는 맺었으나, 오랜 시간동안 피땀흘려 거둔 결과물을 하루아침에 적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오늘날 도시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바꿔서 표현하자면, 평생동안 열심히 모은 전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돼서 길바닥에 쫓겨난 상황과 같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엄청난 비극이죠.
이어서 세 번째 저주는 이방 민족에게 침략당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 보세요.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인데,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의 패배는 정복으로 연결됩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죠. 그렇게 멸망 당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주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저주가 등장하고 가중처벌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앞서 살펴본 세 가지의 저주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과 약탈 당하는 것과 이방 민족에게 정복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정말 끔찍한 저주이자 재앙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저주를 받아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저주에 이어서 다른 저주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 그래서 네 번째 저주는, 가뭄과 흉년입니다. 20절 말씀 보세요.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땅이 산물을 내지 않고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이죠. 앞서 살펴보았던 두 번째 저주, 수확물을 거두되 대적들이 약탈해 갈것이라는 저주와 유사하지만 두 번째 저주 내용에 따르면, 그래도 수확물을 거두긴 거두었습니다. 다 뺏겨서 그렇지 그래도 땅과 나무가 제 기능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저주부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저주이죠.
이어서 다섯 번째 저주는 들짐승의 위협입니다. 22절 말씀 보세요.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 다섯 번째 저주는 레위기 26장 6절과 9절 내용의 정반대 내용이죠. 평화를 얻고, 번성하고, 창대해지는 축복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이 다섯 번째 저주를 보면, 그렇게 큰 문제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현대식 무기가 구비되어있으면 동물은 그렇게 큰 위협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태종 때만 하더라도 경상도에서 세달 동안 수백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숙종 때에는 강원도에서만 300여명이 물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보다 훨씬 더 열악했을 출애굽 시대는 어떨까요. 가나안 땅에 정착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동물들의 위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다섯 번째 저주는 굉장히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저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저주는 전쟁입니다. 25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세 번째 저주 내용, 이방 민족에게 침략당하고 정복당한다는 내용과 중복되는 것 같지만, 여섯 번째 저주의 내용을 보면 저주의 강도가 좀 더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민족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도 가볍진 않습니다만, 2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 칼로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다른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에게 원수를 갚으시겠다는 것이죠.
마지막 일곱 번째 저주는 전염병입니다. 25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일곱 번째 저주는 여섯 번째 저주의 연속선상에 있는 저주인데요. 전쟁이 일어나서 성읍에 모이고 하나님이 없이 자기들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한 곳에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전염병이 일어납니다. 흩어지면 힘이 분산되니 안 되고, 또 모이면 전염병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다 죽어버리고.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살펴본 저주의 내용은 일곱 가지였습니다. 물론 저주의 말씀은 46절까지 이어집니다만, 오늘 함께 살펴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첫째로, 하나님께 저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준행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길에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둘째로, 저주의 내용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날 때 저주를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살펴본 일곱 가지의 저주 내용을 보시면,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내가 재앙을 내릴 것이다. 내가 너희를 칠 것이다. 내가 들짐승을 보낼 것이다. 내가 원수를 갚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곱 가지 저주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의 정황에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저주의 내용만 봐도 그렇죠. 예컨대,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 그 병의 원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디가 약해서 병에 걸렸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저주의 대상이라면, 상황이 어떻든 간에 질병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 예를 들어, 사업을 하다가 잘 안풀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어렵고, 다들 어렵고,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네 번째 저주, 가뭄과 흉년 같은 저주를 베푸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르짖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만을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저주에 관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혐오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인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인지,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이자 향기로서 살아가는 사람인지 돌아보시면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을 쉽게 내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기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인 저주와 징계의 말씀을 묵상케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악하고 어두운 세대 가운데, 주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대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들이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주님의 제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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