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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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어제 말씀에 이어 안식일 논쟁과 관련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말씀인 마태복음 12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먹은 일로 인해 안식일 논쟁이 발생한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역시 안식일에 관하여 논쟁이 일어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제 말씀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한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지적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고, 오늘 본문 말씀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 12장 9절부터 16절까지 등장하고 17절부터 21절까지는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직접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깊이 알아가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마태복음 12장 9절 말씀을 보시면,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회당이면 회당이지 왜 굳이 그들의 회당이라고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화평교회면 화평교회지, 그들의 교회.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 여기에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이런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틀어져서 대립되고 있는 상황을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회당 안에 예수님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회당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12장 10절 말씀을 보시면, 회당 안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른 손인지, 왼 손인지, 손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손부터 팔꿈치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인지, 팔 전체를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회당 안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을텐데, 마태는 한쪽 손 마른 사람만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회당 안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읽으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법적입니까?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목적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냐 안 되냐. 같이 토론해보자. 이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안식일 위반죄로 법원에 고소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십계명 말씀에 근거해서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들의 주된 관심은, 안식일을 지키려면 이렇게 지켜야 해. 랍비들끼리 모여서 만든 39개조 항목을 준수하느냐 준수하지 않느냐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도 그 사람이 치유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의 양 비유를 드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안식일 규정 39개조 항목에는 위험에 처한 짐승을 건져내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짐승의 주인이 직접 건져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짐승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구를 설치해주는 것은 가능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분들을 고려해서 비유를 드신 것이죠.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면서, 양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람은 왜 도와주면 안 되냐는 이런 논리인 겁니다.
자 그런데, 이 안식일 논쟁을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애매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39개의 금지 조항에는 병 고침 항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 방식을 살펴보면, 육체적인 활동이 거의 없습니다. 노동이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죠.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는 말 한마디만 하셨을 뿐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하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행위는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39개 금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이라고 불리는 미쉬나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후대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이런 개념이 널리 퍼져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1장 32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데려온 사실이 담겨있죠.
자 그럼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무조건 안 되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 위독하거나 출산을 앞두고 있는 경우에는 출산을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 사건은 긴박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보더라도,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데, 하루 이틀 이렇게 지낸 것도 아니고, 굳이 안식일에 고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위독한 것은 아니니까요. 다음날 고쳐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최종적인 해석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법에 박식한 랍비들이 율법을 해석한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 논쟁을 통해 안식이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기본적인 목적이 선을 행하는 것에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신 겁니다. 사랑과 자비의 법이 우선시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예수님은 안식일과 관련된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아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못마땅합니다. 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영적인 헤게모니를 예수님께 빼앗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모의하고, 예수님에 대해 고발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이사야서 말씀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마태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비해 대략 두 배 이상 구약성경을 인용하는데요. 그중에서 구약성경을 가장 길게 인용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2장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물론 18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끊이지 않는 난해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구약성경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을 보고 인용했는데, 문제는 인용한 내용이 이사야서 내용과 100퍼센트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옮겨쓰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다른 자료들과 일치하는가 하고 봤더니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70인역을 봐도 일치하지 않고, 맛소라 텍스트도 그렇고 탈굼도 그렇고 100퍼센트 일치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태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로서 마태의 재해석이 반영된 구약 성경 인용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마태가 본인의 신학을 반영해서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에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시간관계상 네 가지의 내용 중에 두 가지 내용만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2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3장 13절 이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시는 장면 다들 기억하시죠? 하늘이 열리면서 이런 음성이 들렸죠.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은 마태가 인용한 말씀,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이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종,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인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실 것이고,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실 것인데, 여기서 심판이라는 단어는 형벌을 내린다는 법적인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심판은 심판입니다만, 이사야서 42장 말씀을 보면, 종이 베푸는 정의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입니다. 정리하자면, 마태복음 12장 18절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12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모두 효용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겠죠. 그러니 상식적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새것으로 교체해야만 합니다. 갈대는 꺾어서 버리거나 태워버리고, 심지는 완전히 꺼서 다른 심지로 바꿔줘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 형태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멀쩡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탁월한 사람. 이런 사람들만을 모아서 사용하시지 않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취약한 사람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백성에게 인생을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쉽게 질책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쉼을 주고 가벼운 짐을 부여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말씀을 지켜야만 우리의 의로움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안식일을 온전히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로 논쟁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규정을 더욱 우선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기본적으로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정신이 내재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42장 말씀을 성취하신 분으로 기록하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며, 성령을 받으신 분이며, 심판을 이방에 알리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사랑과 인내로 그분의 자녀들을 기다려주시며, 상한 부분이 있다면 상한 부분을 만져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시면서,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을 고발하려 드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포하신 주님,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나, 이러한 우리의 영적인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