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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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탄생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죠. 보통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떠올릴 때, 베들레헴의 구유, 목자들의 방문, 천사들의 합창 소리.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요. 마태복음 1장에 이러한 이미지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가장 먼저 족보를 기록한 뒤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요셉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살펴보고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의 이름에 관하여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는 말씀을 읽는 신자의 입장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너무나 당연하고 친숙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요셉이었다면, 과연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마태복음 1장에서의 요셉은 사회적으로 마리아와 결혼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기를 가졌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말씀을 통해 즉각적으로 이 상황을 오해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역사적 실존 인물인 요셉의 입장에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어떻게 행동하기로 합니까? 19절 말씀 보세요.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롭다는 말은, 그가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율법에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의 아기를 가진 마리아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신명기 22장 23절과 2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데, 마리아가 다른 사람과 동침해서 아이를 가졌으니, 율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음한 여인인 마리아를 재판에 넘겨서 돌에 맞아 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 19절 말씀에 따르면 요셉이 어떻게 결정합니까?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기로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기지 않고 이혼증서를 줘서 공적으로 이혼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죠. 요셉의 입장에서 볼 때, 마리아가 누구의 아기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 확실하니, 마리아가 간음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고, 율법을 준수하는 요셉이 율법을 어긴 여성과 결혼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선택을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정의 또는 공의 개념이 강합니다. 이렇게 성경적인 의의 개념에 따라 요셉이 정의롭고 공의롭게 이 사건을 처리했다면,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으로 취급당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행동하기로 결정합니까? 가만히 끊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의의 개념, 정의와 공의의 실현과 요셉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셉의 의로움과 성경적인 의의 개념이 반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공의에는 긍휼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긍휼과 사랑이 없는 의는 껍데기만 의로워 보이는, 허울뿐인 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긍휼과 사랑의 실천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는 것으로 결정했을 때,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요셉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24절 말씀 보세요.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요셉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요셉은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천사를 통해 마리아가 품고 있는 아기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요셉은 믿음으로 그 아이를 혈통상 자신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게끔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갈 때까지 14대. 사로잡혀간 후로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 총 42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이 혈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피를 공유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표현하려면, 그 핏줄을 타고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DNA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피는 섞였을지 몰라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접붙여진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혈통상으로 다윗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까? 예수님께 접붙여져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접붙여진 예수님과, 예수님께 접붙여진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 이렇게 신비로운 아이러니를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스인데,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히브리어 발음, 예호슈아 또는 예슈아 발음을 헬라어 발음으로 바꾼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철수나 영희처럼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지만 예수님 공생애 이후로는 예수라는 이름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자 그래서 보통 우리는 예수님과 관련된 칭호에 대해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손, 인자 등으로 기억하기 쉬운데요.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또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면서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차고 넘치는 권능으로, “그래 거지들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이런 식의 매정하고 차가운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나타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시작될 것이고, 사역의 내용은 가르침이나 축귀, 치유 등의 폭넓은 범위의 사역으로 진행되지만, 결국에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는, 임마누엘과 동일한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마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장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요셉의 모습을 통해 성경적인 의로움의 개념에는 긍휼과 사랑이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성격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 우둔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키시며, 병으로 고통받는 자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백성을 십자가 죽음으로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임마누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임마누엘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그분의 긍휼과 사랑하심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주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하시며, 그분과 동행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임마누엘의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더욱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가난하고 갈급한 심령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매일 매일 깊이 묵상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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