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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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를 기록하면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신약성경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요. 이 주제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시작되었다가 5장 10절에서 중단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6장 20절까지 다른 내용이 등장했다가 7장 1절부터 대제사장에 대한 주제가 재개됩니다. 참 희한하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그냥 한 번에 쭉 설명해도 될텐데, 이렇게 중요한 주제를 하나의 호흡으로 설명하지 않고, 중간에 의도적으로 흐름을 끊어서 다른 단락을 도입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히브리서를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5장 11절에 등장합니다. 5장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아멘.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영적인 지식은 개별적인 학습 능력이나 지적인 수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다루는 주제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려면, 이 말씀을 듣는 1차 청중들의 영적인 상태가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5장 11절 말씀에 따르면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매우 미성숙하고 둔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듣는 것에 둔합니다. 듣는 것에 둔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청력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일까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듣는 데 둔하다는 것은 말씀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죠. 말씀을 받을 때, 믿음으로 받고, 받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말씀은 말씀대로, 내 삶은 내 방식대로.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렇게 왜곡되고 모순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인 지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5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2절 말씀에 따르면 오늘 본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지 오래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모태신앙인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신앙생활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라는 말씀에서 오랜 신앙 경력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오랜 신앙 경력,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한지 오래되었으면 결과적으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영적인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선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의 초보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신앙생활한지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신앙생활의 연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 무엇이고, 과거에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했고. 이런 것들은 히브리서 저자에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것은 다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측면에서 어떤 일을 했었는지, 이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말씀을 받는 1차 청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저자는 히브리서 청중이 젖만 먹을 수 있는 영아의 상태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신앙생활한 지 아주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정상적인 범주 안에서 추론해보면, 이 청중들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영적으로 영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헌신하면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성장하는 것은 매우 매우 당연한 원리입니다. 얼마나 빨리 성장하느냐, 얼마나 깊은 단계로 성장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적으로 더욱 깊은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말씀을 받는 1차 청중들은 어느 순간 과거의 성장단계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 과정이 과연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영적인 성장단계를 역행하는 것은 굉장히 기형적이고 역겨운 상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면, 성장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쌀밥을 먹는 사람이 이유식도 아닌 젖만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죠. 제 아들 이현이가 며칠 전에 첫돌을 맞이했는데요.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면, 조만간 이유식을 졸업하고 쌀밥을 먹는 단계로 발전해가지 않겠습니까? 또 태어나고 나서 며칠되지 않았을 때에는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전부였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뒤집기도 하고, 그러다가 기어 다니기도 하고, 그러다가 무언가를 짚고 일어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최근에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렇게 사람이란 존재는 시기에 알맞게 성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기형적인 퇴행을 맞이하면,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비정상적인 영적인 상태에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깊이 있는 설명을 진행하다가 어쩔 수 없이 흐름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래서, 과거의 성장단계, 젖만 먹을 수 있는 단계로 돌아가 버린 히브리서 청중들을 향해서 저자는 이들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합니다. 13절과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말씀을 받는 청중들의 신앙의 연수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성한 자가 되어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연수나 경험만으로는 자신의 성숙한 신앙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비성경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오래 했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무조건 성숙해졌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행위 자체. 교회에서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들, 이것이 영적인 성장단계의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장성한 자로 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자는 그냥 듣기 좋은 말로 지금까지 해왔듯이 앞으로도 신앙생활 계속해주세요. 이 정도가 아니라, 젖먹이 단계로 퇴화한 그 상태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다시 성장하기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사람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완전한 사람 또는 성숙한 사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숙한 사람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까요? 절대 그렇지 않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각 능력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신앙적으로 발전해야만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면,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적용하고 실습하면서, 또 세상적인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고 부딪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뼈저린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단계를 꾸준히 지속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한 음식을 먹는, 보다 깊은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영적인 장성함, 성숙함, 완전함은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성숙함을 얻으려면 지속적인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물론 훈련하다가 실패하고 쓰러지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용납될 수 없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젖먹이 상태로 돌아가면, 그래 젖 먹고 다시 천천히 크면 되지. 기다려줄게. 시간 많아. 이럴 수도 있는데, 저자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내용 알고 싶어? 그럼 그 정도의 영적인 수준으로는 안돼. 젖먹이 상태로는 안돼. 듣는 데 둔한 그 상태, 말씀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유아기적인 영적인 상태로는 안돼.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히브리서 저자는 영적으로 기형적인 퇴행을 겪고 있는 히브리서 1차 청중들의 상태를 진단했습니다. 저자는 다시 젖을 먹는 성장단계로 돌아가 버린 청중들에게 그 러한 상태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히브리서 저자가 너무 냉정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지만, 히브리서 6장 2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히브리서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가르침을 떠나서 온전한 데로 나아가자. 우리가 함께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수준 낮은 니들은 앞으로 고생좀 해야겠다. 앞으로 니들은 좀 힘들겠다. 젖먹이 졸업하려면 빡세게 훈련 받아라. 이런 식으로 남 얘기하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자. 함께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디로 나아가자고 권면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의 영적인 목표지점은 영적인 완전함입니다. 신앙적인 완전함이란 우리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완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영적인 완전함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매일같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며, 그 가운데 말씀대로 사는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신앙의 연수를 거듭할수록 우리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깊이 있게 쌓아갑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스스로 경계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다닌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또 성경 말씀에 대해 박식하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지식적으로 말씀을 아는 만큼 삶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겸손케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데에는 개별적인 학습 능력과 이해력에 달려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 주위에 영적으로 젖먹이 단계로 퇴화한 지체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중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어있는 그 심령을 주님께서 만져주시어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의 연수와 경험을 자기 의로 삼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악을 분별하고, 또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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