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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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8장은 사울이 엔돌이라는 지역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28장 3절 말씀 보세요.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칭찬받을만한 일이죠. 사실 사무엘서에서 사울왕이 영적으로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나서야 칭찬받을 만한 일을 딱 한 가지 해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사람, 다시 말하면 귀신을 통해 미래를 점치는 사람, 박수무당, 이런 사람들을 다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4절과 5절 말씀 보세요.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냈을 때 즈음에, 블레셋 민족과 큰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예전에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목적은 블레셋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블레셋 민족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승리로 이끌어주실 줄 믿고 전쟁터에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을 위해 싸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떠했습니까? 5절 말씀 다시 보세요.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군사력.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체감하고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이어서 6절 말씀 보세요.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의 내면이 두려운 마음으로 물들었을 때 사울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꿈으로도 알려주지 않으시고, 제사장을 통한 계시인 우림으로도 알려주지 않으시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대언하시는 말씀으로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완전히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울에게 무응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소 매정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사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것으로 크게 책망을 받습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게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후에, 사울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다윗을 찾아서 죽이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사울은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사무엘 선지자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블레셋은 점점 더 체급을 키워서, 전투력을 강화시키면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울은 이제서야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해야할 지 판단이 바로 서지 않으니,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동안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울이, 본인이 급한 일 생겼다고 갑작스럽게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울에게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요? 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 같아도 괘씸해서 응답해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각한 채로 기도 응답만 받으려는 신앙적인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한 사울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께 응답받을 때까지 부르짖으면서 통곡하고 회개합니까? 그렇지 않죠. 7절 말씀 보세요.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신하들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서자마자 어떻게 행동합니까?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7일 동안 기다리라고 하죠.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본인이 나서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당장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해주지 않으시네? 어떡하지? 안 되겠다. 신접한 여인이라도 찾아서 물어봐야겠다. 이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응답해주시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또 기다려보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 사울의 과거와 현재의 영적인 상태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잘못으로 인해 실패를 겪으면, 그 일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을 얻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영적으로 기다릴 줄 모르는 사울의 부족함과 연계되는 사울의 또다른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사무엘상 28장 3절 하반절 말씀 다시 보세요.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그리고 7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아니, 본인이 명령해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다 쫓아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 안 해주신다고 자기 손으로 내쫓은 신접한 자를 다시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자, 이런 모습을 보면,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근본적인 동기가 믿음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쫓아낸 것이든, 자기 의를 위해 쫓아낸 것이든, 뭐가 됐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신접한 자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신접한 자들을 쫓아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신접한 자를 이스라엘 땅에 다시 받아들이거나, 그들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모세오경의 율법이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0장 6절과 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0장 2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19장 3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대로 신접한 사람을 따르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남자든 여자든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데 돌로 쳐서 죽이는 방식으로 제거해야만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신접한 자를 따르는 것은 스스로를 더럽히는 행위가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점집에 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물론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점집에 다니는 분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만, 한국교회 교인 중에 여전히 점집에 드나드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점집에 가는 것일까요? 미래 일에 대해 확신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흔들림 없이 굳게 신뢰한다면, 점집에 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너무도 궁금해하는 일들, 혹은 걱정되는 일들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8절 말씀 보세요.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결국 사울은 엔돌이라는 지역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엔돌이라는 지역은 사울이 머무는 곳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고 블레셋 진영에서는 3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만나려면 블레셋 진영을 지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엔돌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변장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의복과 장신구가 없어야만 블레셋 병사의 검문을 피할 수 있고, 신접한 자에게도 사울의 정체를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울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품위와 품격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신접한 자를 만나기 위해 변장한 채로, 블레셋 진영을 통과해서 지나갑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맞이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당장 내 앞길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또 내 손자, 손녀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점집에 가서 해소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일인지 기억해야만 합니다. 역대상 10장 13절과 1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줄 모르고, 인내할 줄 모르고, 궁금한 것을 어떻게든 해소하려 했던 사울의 모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던 두 가지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역대기 저자에 따르면 사울이 죽은 이유는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그 범죄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으며, 여호와께 묻지 않은 것. 이것이 범죄라는 것입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서 점집에 가서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부적을 사오거나. 이러한 모든 미신적인 행위는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는 것에 해당되는 일이며,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잘 되든 못 되든,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신뢰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일들을 믿고 기대하시면서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앞길을 친히 인도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미신적인 행위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 주시고,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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