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길과 우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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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는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지혜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10장 1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면, 전도서의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도서의 저자가 구조를 구분하기 어렵게 말씀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쉽게 이해하려면 본문에서 나타나는 지혜의 두 가지 특징을 구분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전도서 10장 3절 말씀 보세요.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우매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지혜가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말 그대로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매한 사람은 어리석은 말, 미련한 행동, 이런 언행들을 거침없이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 줄을 모릅니다. 만약 이런 부분을 인지하고 매사에 조심한다면 우매한 사람이 아니겠죠.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우매함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항상 지혜롭지 못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 지혜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어리석게 행동할 수도 있고 실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잘못된 언행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우매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본인의 말과 행동으로 본인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전도서뿐만 아니라 잠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12장 3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지만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또 잠 13장 1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전도서의 표현으로 바꿔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롭게 행동하고, 어리석은 사람, 우매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전도서 10장 3절에서는 우매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5절과 6절에서는 지혜가 없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0장 5절 말씀 보세요.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우선 5절에 등장하는 재난이라는 단어는 죄악이라고 바꿔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렇다면 전도서의 저자가 발견한 죄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권자, 통치자가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3절에서는 일반적인 우매함이 죄다. 이렇게까지 표현하지 않지만, 5절에서는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렇다면 주권자의 어리석음이 어떤 이유에서 죄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다스리는 곳에서 그의 우매함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며, 그가 다스리는 국가에 여러 가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 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주권자의 우매함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통치자의 허물과 잘못된 판단이 우매한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벼슬에 앉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초래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과 우매한 사람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180도 바뀐다면, 지혜롭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우매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전도서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고민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한 국가를 이끄는 수장과 그 수장을 보필하는 위정자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어리석은 사람이냐에 따라서 국가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으며, 국민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정치인이 등장하기를 고대합니다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최대한 지혜롭고 기독교에 친화적인 정치인을 뽑는 데 힘을 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내용은, 지혜로움의 한계입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지혜에 관해서 만큼은 예찬론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지혜가 최고다. 지혜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삶이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그와 동시에 지혜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전도서 10장 1절 말씀 보세요.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죽은 파리 몇 마리가 향기름에 둥둥 떠다니면, 향기름에서 온전한 향기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마찬가지로 깨끗한 물에 먹물 한방울만 떨어뜨려도 투명한 물이 순식간에 변색 됩니다. 이처럼 적은 우매, 적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존귀를 손쉽게 더럽힐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해선 안 됩니다. 전도서에 등장하는 이 지혜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리석음에 의해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혜는 너무나 연약해 보입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전도서 10장 8절과 9절 말씀에서 지혜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기록하는데요. 먼저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이 말씀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견해가 완전히 다른데요. 8절 말씀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고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기 꾀에 속아 자기가 함정에 빠질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서 담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담 사이에 있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서의 저자가 8절 말씀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함정을 파는 사람과 담을 허는 사람. 이 말만 놓고 봐서는 함정 파는 사람과 담 허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 그래서, 8절 말씀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함정 파는 사람은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 덫을 놓거나 함정을 파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히 일해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고 했는데, 본인이 설치한 함정에 본인이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담을 허는 사람, 이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담을 헐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과정 중에 뱀에게 물릴 수 있다는 겁니다. 지혜를 발휘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가측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절 말씀도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돌들을 떠내는 사람, 나무를 쪼개는 사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합법적인 활동 또는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목적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악한 마음이 없고 지혜를 발휘해서 일을 하더라도 과정 중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요리할 때 칼질을 하다가 다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요리하다가 상처를 입는 일이 간혹 있을 수 있죠. 자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동행하심을 간구하면서 살아도,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모든 일에 성실한 자세로 임하더라도, 과정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의도치 않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피조물의 인생이며, 이것이 바로 지혜의 한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첫째로, 어리석은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수준을 떠나서 말과 행동 가운데 어리석음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 가운데 어리석은 부분들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지혜의 한계입니다. 전도서 10장 1절에서 죽은 파리 몇 마리가 향기름 전체를 더럽힐 수 있듯이 적은 어리석음이 지혜를 더럽힐 수 있으며, 주권자의 죄악과 어리석음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지혜롭게 생업에 종사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도서 10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지혜가 가지고 있는 한계로 인해서 허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게 살면 뭐합니까. 죽은 파리 몇 마리가 지혜로움을 더럽힐 수 있고, 또 우리의 지혜와 무관하게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이 국가를 이끌면, 우리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담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한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도 지혜롭게 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지혜의 한계를 절실히 체감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인생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전체 맥락에서 살펴보면,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지혜가 주는 유익들을 다양하게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지혜의 한계를 인지함으로써 하나님께 더욱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영적인 지혜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만약 전도서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혜를 끝없이 높인다면 우리는 인생 가운데 굳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솔로몬은 사람이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과, 지혜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지혜를 배우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는 것.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지혜의 필요성과 지혜의 한계. 이 두 가지의 균형을 기억하시면서, 영적인 진리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에 관해서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혜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점을 인지하시고,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지하시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없이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를 활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슬기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이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분별하며, 언제 어느 때나 주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