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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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에 대한 말씀을 묵상할 때 예컨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말씀이라든지, 아니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말씀이라든지, 혹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말씀이라든지, 이런 말씀들의 경우에는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가기 쉽습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일 저녁부터 다른 의미에서 고난을 받았는데요. 오늘 이 시간,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고, 우리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 첫째는 (화면) 고난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18장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신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체포조를 투입해서 은밀하게 예수님을 사로잡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습니다. 마치 함정과도 같은 장소인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주위 환경과 조건을 모르셨을까요? 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실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겟세마네에 들어가면 잡히시고 고난당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아뇨.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계셨을 겁니다.
이어서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시작.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가룟 유다는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횃불과 무기로 무장한 로마의 보병대와 예루살렘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등장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한적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멀리서 이동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강남역 같은 번화가에 가로등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 아니었습니까? 물론 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불빛이 너무나도 흔해진 요즘 시대이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로등 같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겠죠. 그렇기 때문에 저 멀리서 로마의 보병대들과 경비병들이 횃불을 들고 대열을 맞춰서 이동한다면, 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무슨 깜짝 놀라면서 언제 왔느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겁니다. 어느정도 가까운 거리에 왔을 때 체포하러 온 줄 알았을 겁니다.
자 그렇다면, 군인들이 체포하러 올 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체포조를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그 시발점은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아시고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들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장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시작.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어서 14절과 15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어서 18절 상반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방금 읽은 말씀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말고는 대체할 수 있는 행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바에 따르면 설명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겁니다. 자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1절과 2절,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는 장면과 3절에서 체포조가 몰려오는 데 자리를 피하지 않은 장면, 이 두 가지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예루살렘 성전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입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지도자는 서로 원수 같은 관계인데 두 집단이 적과의 동침을 허용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눈엣가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로마의 지도자 입장에서 예수님은 무조건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서로 사이도 좋지 않은 두 집단이 나란히 병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상황이라면, 없는 죄라도 덮어씌워서 죽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18장 1,2,3절에서 이미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 둘째는,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죽임당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번 주간에 요한복음을 계속 살펴보면서 묵상하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사형당하실만한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적당히 적당히 말만 잘하면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체포 직전에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화면) 18장 4절과 5절 말씀 보세요.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고난 당하실 것을 다 아시는 상황에서 말씀하시죠. 누구를 찾는지 물어보시니 체포조가 무엇이라 답합니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엇이라 답하십니까? 내가 그니라.
이어서 6절 말씀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또 8절 말씀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4절에서 8절까지 말씀 중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죠.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내가 그니라. 예수님은 이 표현을 반복해서 세 번씩이나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 누구를 찾는다고 합니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니라. 라고 대답합니다. 한글 성경에 의역된 내용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원어로 읽으면 뭔가 이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대화는 문맥상으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면, 정확하게 “그래. 내가 바로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말해야 대화가 성립되는데, 원어를 직역해서 읽으면 (화면)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사용되는데요. 이사야서 43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여기서도 나는 그이니. 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서 나는 그이니. 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겠죠. 그런데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학자들이 “나는 그이니”라는 단어를 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는가 하면, 이사야서 43장 13절에서 나는 그이니 라는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헬라어로 번역될 때 에고 에이미라고 번역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모습, 이렇게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 세 번째는, (화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아무 말하지 않고 받아서 마시는 겁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고난 당하실 것에 대해 고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잔을 옮겨주실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시점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8장 11절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 뜻을 바꿔달라고, 제발 잔을 옮겨달라고 떼를 쓰거나 혼자서 고민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주님의 뜻대로 행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고 고난의 잔을 받으십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특별새벽기도회 첫째 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시는 내용을 묵상하면서 고난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고난에 대해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로,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으로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다른 사람의 일처럼 치부해선 안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박해와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이십니까?
사랑하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고난주간은 우리 예수님만 못 박는 주간이 아닙니다. 죄악된 우리의 본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진정으로 주님께 돌아오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을 회복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 특별 새벽기도회에 잘 나오셨습니다. 이번 한주간 예수님의 고난과 또 우리가 감당하고 따라가야 할 그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변화되는 그런 귀한 시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나아갑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고난을 받으며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과 헌신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오니, 주여 우리 심령을 붙잡아 주시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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