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갈고리와 세마포 에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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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은 사사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사무엘을 일반적으로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무엘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무엘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성장했으며, 사무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의 시대상은 어떠했는지, 이 시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무엘상 2장 12절 말씀을 보시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의 내용을 떠올려보시면, 사무엘상 1장 1절부터 2장 11절까지 어떤 내용이 등장합니까? 엘가나와 한나, 사무엘의 출생과 한나의 기도, 이런 내용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엘리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는 엘리의 아들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 사무엘서 저자의 관점과 평가는 뚜렷합니다. 이 아들들이 키가 몇이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잘하고, 어떤 꿈이 있고. 이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행실이 나쁜 것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행실이 나쁘다는 말씀은 개역개정에서 크게 의역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직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이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벨리알의 아들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거짓증언하는 사람들, 술에 취해서 망령된 일을 저지르는 질적으로 최악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벨리알의 아들들이란 멸망의 아들들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엘리의 아들들이 어떻게 행동했기 때문에 멸망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사무엘상 2장 13절부터 15절 말씀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엘리의 아들들이 어떻게 행동했길래 멸망의 아들들이라고 불립니까? 제사장의 권한을 남용해서 제사장의 사환들, 종들을 시켜서 하나님께 제사 드릴 고기를 삶을 때 갈고리를 넣어서 걸려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들 마음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멸망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먼저 드리기도 전에 생고기를 내놓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행위는 명백하게 율법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레위기 3장 1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모든 기름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고기를 가져간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행위입니다. 레위기 7장 2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먹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끊어진다는 말이 처형시켜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공동체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영적인 공동체에서 언약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제물의 기름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무엘상 2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제사 드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에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지금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을 것이다. 이건 무슨 거의 날강도 수준이죠. 아예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먼저 바친 다음에 주겠다는데, 이걸 못참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먼저 바칠 게 아니라 먼저 자기에게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겁니다. 이러한 마인드는 하나님이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다.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의 내용만 놓고 보면, 이런 일이 있었다. 단회적인 사건처럼 느껴지는데, 히브리어 뉘앙스를 살려서 읽어보면, 엘리의 아들들의 행위는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동사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횟수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습관적으로 손대는 이 엘리의 아들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7절에 등장합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바른성경 번역본에 따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매우 큰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 라는 말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여호와의 면전에서 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뭔가 아이러니한 말씀이죠. 사람이 어떨 때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지어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을 때 죄를 짓지 않습니까? CCTV 앞에서 대놓고 죄를 짓는 바보 같은 사람은 요즘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어떻게 죄를 짓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죄를 짓는다는 겁니다. 물론 본인은 모르겠죠.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이 무슨 해, 달, 별과 같이 하늘에 떠 있으면 죄를 함부로 지을 수 있겠습니까? 무서워서 못 짓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분별력 없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매우 크게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여호와의 제물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도 모자른데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사를 멸시했다는 겁니다. 멸시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깔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까? 엘리의 아들들. 이스라엘을 이끄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오늘날 우리도 눈여겨 봐야할 말씀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아무리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믿음생활 잘해도, 자식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자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아가지 않으면, 엘리 아들들이 받은 평가를 똑같이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부모의 헌신이 자식의 죄를 덮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엘리 아들들은 처음 등장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았습니까? 멸망의 자식들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멸망의 자식들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먼저 드릴 제물을 자신들이 먼저 취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내가 먼저. 하나님이 아닌 내가 먼저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거부해도 강제로 자신들의 직권을 남용하면서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마땅한 제물을 빼앗았습니다. 이는 한 두 번 저지른 실수가 아닌 습관적인 행동이라는 내용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사장의 아들들도 저 모양 저 꼴인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겠느냐. 시대상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죄에 대한 책임이 경감되지 않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만 죄 짓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고 먼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죄다 어기면서 사니까, 그 영향을 받아서 나도 죄 짓게 된 거고. 그러니 내가 지은 죄의 책임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핑계 대고 남 탓할 수 있습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믿음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얼마나 죄를 많이 짓든, 시대가 얼마나 악하든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 주위 환경, 교회. 뭐 이런 다양한 요소들 탓할 것 없습니다. 사무엘상 2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엘리의 제사장들이 멸망의 자식들이라 불리던 그때, 그 시각, 사무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엘리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갈취하는 동안 사무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라는 말은, 17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이 말씀에서 여호와 앞에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17절에서 “죄가 심히 큼은”이라는 말은 21절 제일 마지막 부분,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크다 라는 말과 자라니라 라는 말이 같은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엘리 제사장 아들들의 죄가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점점 커져만 가는데, 반대로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고, 또 여호와의 면전에서, 점점 커져갔다는 겁니다. 한쪽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계속해서 키우고 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쭉쭉 성장해 갑니다.
자 이렇게 사무엘서 말씀에 따르면, 중간은 없습니다. 신자는 엘리의 아들들 또는 사무엘 둘 중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죄를 계속 지으면서 죄에 대한 책임을 키워나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나날이 성장하며 살아갈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부디 멸망의 자식들이라 기록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하루도 온전히 주님께 영광 돌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악한 시대였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이끄는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빼앗는 모습과,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나날이 성장하는 사무엘의 모습을 대조해서 살펴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을 주시니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환경들을 탓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 사람 때문에, 무엇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어떻든,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성장한 사무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죄책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오늘도 우리의 삶을 주님의 뜻 가운데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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