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능히 통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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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지혜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는 솔로몬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전도사 7장 23절과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7장 24절 말씀에 따르면, 이미 있는 것은 너무 멀고 또 깊고 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능히 통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을 통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 그리고 사람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솔로몬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의 저자들 또한 깊이 깨닫고 있던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55장 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로마서 11장 3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아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인생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너무나 쉽게 무지한 말을 뱉어댑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는 주님의 자녀들은 성령 훼방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으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알고 있으며 우리로서는 인생에 관하여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지식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주님의 자녀들은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인생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하고 또 고찰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5절 말씀 보세요.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솔로몬이 모든 일을 살펴보았는데, 솔로몬에 따르면 인생의 모든 일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특징은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특징은 성경이 말하는 일반적인 원칙인 인과응보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복을 받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받는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주 아주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말하는 인생이란, 인과응보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인생이 아닙니다. 15절 말씀 다시 보세요.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자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이라는 영적인 특성이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죄악이 생존에 있어서 꼭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 달갑지 않은 내용입니다. 죄를 지으면 당장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어떻습니까?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내용이 여러 군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73편 3절 말씀 들어보세요.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편 73편 12절에서 14절 말씀 들어보세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이어서 예레미야 12장 1절 말씀 들어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전도서 7장뿐만 아니라 시편 73편과 예레미야 12장 말씀에 따르면, 형통하고 평안하며 장수하는 악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인생이 만화영화와 같다면, 그리고 만약 인생이 철저하게 인과응보를 따른다면, 악인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장수하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이 매우 짧아야 하고, 악인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순간이 속히 도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믿음이 연약한 분들의 경우에는 혼란스러우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으면 뭐하냐.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뭐하냐. 결과적으로 악인보다 못한 인생을 살 거면 뭐하러 하나님 믿냐. 구원이 무슨 소용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입장에서 인생을 판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뿐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불투명한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모든 것들이 영적으로 선할 것이라고 너무나 쉽게 착각합니다. 만약 성경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기계적으로 적용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멸망 당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서 7장 29절 말씀 보세요.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도 사람의 잘못이요. 정직하게 창조된 사람이지만 많은 꾀들을 내어 죄를 짓는 것도 사람의 잘못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상과 인생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물과 기름을 분리하듯이 엄격하게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분하실 수 있지만, 우리로서는 감히 판단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질병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우리의 지혜로 감히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어서 인생의 두 번째 특징은, 극단적인 의와 지혜가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7장 16절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이 말씀은 성경에서 잘못 이해하기 쉬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16절 말씀 보세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6절 말씀에 따르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고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셨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에는 단점이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많이 닮아가면 닮아갈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6절 말씀을 보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패망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죠. 성경적인 의로움의 개념을 16절 말씀에 적용하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면 안되니까, 적당히 적당히 신앙생활해야만 합니다. 또 적당히 의로워야만 합니다. 너무 지나치면 안 되니까 적당히 예수님 닮아야 합니다. 이어서 17절 말씀 보면,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고 하니까, 적당히 죄짓는 건 허용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자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한 결론이 나옵니다.
자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경적인 의로움과 지혜를 대입해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6절 말씀에 나오는 “의인”이라는 단어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외식과 외적인 의로움으로 해석하십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단번에 이해가 되죠. 가식적인 의로움, 보여주기 식의 의로움, 이러한 의로움은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영혼에 해롭습니다. 자신의 본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척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는 것은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또한 지나치게 악인이 되는 것 역시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행위입니다. 그렇다고 “죄 한두 개쯤은 괜찮겠지”라는 식의 안일한 마음도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셨네? 이 정도는 괜찮구나? 이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전도서 7장 말씀을 통해 인생의 두 가지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특징, 성경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사상이 항상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특징,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의로운 모습을 보인다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의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죄악된 모습은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습니다.
이 두 가지의 특징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이란 것이 참으로 복잡미묘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이러한 인생의 특징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전도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에 따르면, 우리가 인생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8절 말씀에 따르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전도서 7장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우리가 감히 판단할 수 없는 일들, 인생에서 발생하는 여러 이해할 수 없는 사건사고와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이제 그만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텐데, 그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고민을 가지고 끙끙 앓을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인생을 충성되이 관리하며 삶으로 영광 돌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에 관해 모든 것을 다 알기를 원하는 우리의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송하며, 헤아리지 못할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청지기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원하오니, 주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