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주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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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다윗 일행은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무엘하 19장 16절에는 시므이가 등장하고, 24절에서는 므비보셋이 등장하고 31절에서는 바르실래가 등장합니다. 세 인물 중에 바르실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윗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본인이 다윗과 연루되어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땅에서 긍정적인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죠. 물론 다윗의 성정상 감정적으로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이진 않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정하는 사람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함부로 예측할 순 없습니다. 본인 돈으로 도박할 수는 있어도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시므이와 므비보셋은 이스라엘 왕이 자비롭게 행동할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낙관적인 전망에만 기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귀환하기 전에, 다윗이 돌아오는 길에 마중을 나가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다윗과 대화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사무엘하 19장 24절에서 30절까지는,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왜 찾아왔으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무엘하 19장 24절 말씀 보세요.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우선 므비보셋이라는 인물은 다윗이 목숨처럼 사랑한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므비보셋은 유년시절에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렇게 몸이 불편한 사람은 사회에서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9장 말씀에 따르면,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므비보셋을 선대합니다. 여기서 “선대하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맛있는 식사 한번 대접하고, 소정의 선물 좀 보내주고, 이 정도가 아닙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사울이 소유했던 모든 땅을 돌려주었고, 다른 왕자들과 동일하게 다윗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또한 사울의 시종이었던 시바 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므비보셋을 섬기게 했습니다. 이 정도면 다윗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선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무슨 재산만 늘려준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므비보셋을 선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까지 므비보셋을 선대했으니, 므비보셋 역시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므비보셋의 할아버지인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인 요나단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봤을 때, 가족과의 관계가 어떻든, 이제 자기 주위에 남아있는 친족이 없는 상태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므비보셋을 기억해서 선대하는 다윗의 마음을 기억한다면, 므비보셋 역시 다윗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므비보셋의 삶 가운데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과 다윗의 최측근들이 백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다윗 일행에 합류하지 못합니다. 합류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하나님만 정확하게 아시겠습니다만, 팩트로만 보았을 때, 므비보셋은 도피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주된 문제입니다. 므비보셋은 도피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고, 사무엘하 16장 말씀에 따르면,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이 도피할 때 나귀와 떡과 과일을 다윗 일행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니 다윗은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시바는 므비보셋을 섬기는 시종인데, 주인은 오지 않고 시종만 와서 물품을 제공하니, 당연히 물어볼 수 있겠죠. 그러자 시바는 사무엘하 16장 3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시바가 전한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다윗이 선대한 모든 선한 행위를 악으로 갚는 것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 시바의 말이 사실이라면 므비보셋은 인간 백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자 그래서 다윗은 시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사울 소유의 모든 땅이 이제 시바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므비보셋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잃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므비보셋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이 요단강까지 대략 32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무릎쓰고 찾아온 것이죠. 탈 것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 거리를 찾아온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사무엘하 19장 24절 말씀에 등장하는데요. 24절 말씀 보세요.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사무엘하 16장에서 시바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므비보셋이 무슨 반역자인 것처럼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무엘하 19장 24절에 보면 므비보셋의 모습은 반역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24절의 말씀은 므비보셋이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한 내용이 아니라, 사무엘서 저자의 기록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거짓된 내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자 그래서, 므비보셋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다는 것입니까?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개인적인 건강과 위생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윗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뭐 금식도 할 수 있고 면도하지 않을 수 있고 옷을 세탁하지 않고 입을 수도 있죠. 하루 이틀 정도야 버틸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다윗이 왕권을 언제 회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겁니다.
오늘날 사무엘하 말씀을 읽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무엘서 저자가 이렇게 기록했으니 사실이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다윗이 실제로 므비보셋의 므비보셋의 형편없고 꼬질꼬질한 행색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뜻을 결정하기 전에 므비보셋에게 전후 사정을 확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므비보셋이 대답합니다. 26절과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므비보셋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도피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시바가 자신을 속이고 다윗을 찾아가서 자신을 모함했고 그 결과 재산을 빼앗겼다. 이런 입장이죠. 반대로 시바의 입장은 무엇이었습니까? 압살롬으로 인해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자,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라고 므비보셋이 말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두 사람은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둘 중에 한 사람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님들이 보실 땐 므비보셋과 시바 중에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사실 정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서 저자가 직접적으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황상으로 보면 므비보셋은 억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권을 빼앗긴다고 해서 므비보셋이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왕이 될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다윗의 아들들도 있고 다윗의 친척들도 있고 얼마든지 왕이 될 사람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나라가 내 나라가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또한 시바의 경우에는, 므비보셋을 모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다는 점에서 시바가 거짓말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합니다. 물증이 없이는 시바를 거짓말쟁이로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무엘서 저자만큼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야속하게도 사무엘서 저자는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힌트조차 주지 않습니다. 시바는 시바대로, 므비보셋은 므비보셋대로 다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누가 거짓말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의 처분 방법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러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길에 므비보셋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습니다. 누가봐도 약자는 므비보셋이고 이득을 본 사람은 시바이지만, 물증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증거가 없이 시바를 벌할 수 없고, 시바에게 넘겨준 재산을 몰수할 수 없습니다. 또한 므비보셋의 행색이 그러하다고 해서 무조건 므비보셋의 말이 옳다고만 볼 수는 없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정말 어려운 문제를 다윗은 이렇게 해결합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정확하게 반반 나누라는 것이죠. 자, 이러한 판결 어디서 본적 있지 않으십니까? 네. 솔로몬의 판결이 떠오르시죠. 두 엄마가 한 아기를 놓고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솔로몬이 어떻게 판결을 내립니까? 아기를 반으로 갈라서 나눠줘라. 그러자 진짜 엄마는 자기가 포기하겠다고 말하죠. 바로 이 솔로몬 재판의 판례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 같이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만 뜨겁다도 해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해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그 크신 사랑과 자비와 인애를 닮아야만 합니다. 또한 피조물로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문제들, 알지 못하는 난제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니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이러한 다윗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쟁이는 내가 가려낼거야. 적색분자는 색출해 낼 거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지만, 주리를 틀든, 곤장을 치든, 어떻게든 거짓을 실토하게 만들거야.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상황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시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도 진실을 말씀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진실을 밝혀내고자 애쓰는 노력보다, 상황에 맞게 적절하고도 지혜로운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그러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나,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는, 우리의 성숙한 인격과 지혜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내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우리의 뜻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연약한 피조물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맞게 적절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확실히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넘겨 짚고 오해하며 누군가를 상처주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 우리의 성숙한 인격과 섬김과 지혜로운 행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돌리는 모든 성도님들 될 수 있도록 주여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