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시작되는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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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해 다룹니다. 레위기 11장에 등장하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은 불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대해서 구약시대에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또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고, 도대체 왜 어떤 기준으로 이런 복잡한 율법을 주셨는가? 하는 의문점은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레위기 11장을 아무리 읽어도 어떤 기준으로 정결함과 부정함을 나누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 가지의 해석 방식을 제안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해석 방법은 자의적인 해석 방식입니다. 이는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의 구분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해석 방식입니다. 추정에 근거한 다른 모든 의견들을 배격하는 해석 방식이자 기준을 알 수 없다는 의견입니다.
두 번째 해석 방법은 제의적인 해석 방식입니다. 부정한 짐승들이 다른 우상을 섬기는 종교 예배에 사용된 짐승들이거나, 다른 우상을 상징하는 짐승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고, 다른 우상 종교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지었다는 주장입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해석 방식이지만, 애굽이나 가나안 사람들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소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제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라면, 소는 부정한 짐승으로 구분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세 번째 해석 방법은 위생적인 해석 방식입니다. 정결한 짐승은 먹기에 안전한 짐승이고 부정한 짐승은 먹기에 위험한 짐승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생적인 해석 방식은 일부 규정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생물들을 먹을 경우에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그 어떠한 암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해석 방식은 상징적인 해석 방식입니다.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인데요. 일관되지 않은 해석 방식이고 굉장히 자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방식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자, 이렇게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네 가지 해석 방식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나름 그럴듯하면서도 그럴듯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사실 레위기를 연구하는 구약학자가 아닌 이상 정결함과 부정함을 구분 짓는 기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의 음식법은 예수님께서 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장 19절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을 나누는 기준이 예수님으로 인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데, 어떤 환상을 봅니까?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에 근거해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죠.
이렇게 신약성경에서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이제 더 이상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위기 11장 말씀 전체가 죽은 말씀이 되었다거나 말씀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레위기 11장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이 레위기 11장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짧게 나누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레위기 11장의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의 구분을 지키는 행위에는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말씀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과정을 요구받습니다. 그냥 신분이 바뀐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매일 자신들이 먹는 음식들을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을 구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말씀하신 음식이니 감사함으로 먹어야지. 아, 이 음식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음식이니까 먹지 말아야지. 이런 마인드로 매일 매일 생활한다면, 음식을 구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의미, 정결함과 부정함의 의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묵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음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주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돌아볼 수 있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주일에 교회 나온다고 해서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새벽기도회 매일 나온다고 해서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법을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는 과연 어떠한가, 이러한 부분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결함과 부정함의 규례를 목숨처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 우리 신앙생활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의로 여겨지면 안 되기 때문이죠. 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를 극단적으로 배격하다보면 어느새 아무런 행위 없이 머리에 사상만 남게 됩니다. 열매 없이 보이지 않는 뿌리만 남아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런 상태는 성경이 말하는 바른 신앙생활과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니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타협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본인이 생활하고 있는 곳은 바벨론이고, 바벨론에 끌려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바벨론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이고, 이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눈 밖에 나면 죽임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니,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타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까짓거 음식 좀 먹으면 어떻습니까? 돼지고기나 포도주 이런 음식들 좀 먹으면 어떻습니까. 먹으면 죽습니까? 그런 것 아니죠. 그냥 음식입니다. 서두에 설명드렸듯이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는 기준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정결함과 부정함이 나눠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성적인 사고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 율법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남유다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다니엘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 이러한 다니엘의 마음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함께 나눈 본문 말씀은 문자적으로 적용할 내용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이 말씀을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을 통해 우리 믿음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정결함과 부정함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열심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시로 다니엘을 말씀드렸죠. 자신의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정결함을 지키려 했던 그 순수한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있게 고민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정결함과 부정함의 규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일상생활 가운데 말씀을 지킴으로써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려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율법주의를 정죄하며 행함 없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 우리 모두에게 건강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