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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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0장과 21장은 이스라엘의 끔찍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뒤처리를 위해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내를 구해주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죠. 아무리 그래도 성경인데,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성경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이렇게 수위 조절되지 않은 채로, 필터링되지 않은 채로 기록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20장과 21장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집니다.
사사기 20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열한지파가 무려 40만명에 달하는 동맹군을 결성하여 베냐민 지파의 씨를 말리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룹니다. 사사기 말씀을 지금까지 충실하게 묵상하신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이스라엘이 40만명의 동맹군을 결성했다는 대목에서부터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디안이나 블레셋과 같은 이방 민족들에게 압제를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십만에 달하는 동맹군을 결성한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도 없습니다. 진멸해야 마땅한 이방 민족과의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 사사에 의해 진행되고 적은 숫자로 승리하는 사사기 특유의 패턴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동족상잔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4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편성하게 되죠. 이러한 비극적인 전쟁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직전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베냐민 지파가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것도 모자라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에게 자기 딸들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 체제가 무너진 것도 모자라서 베냐민 지파가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숨이 턱하고 막힙니다. 은혜받고 싶어서,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폈는데,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이어서 사사기의 마지막 장인 21장에서는 베냐민 지파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의 후회와 베냐민 지파를 되살리기 위해서 아내를 구해주는 일들이 등장합니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내용이죠. 그렇게 후회하고 수습할 거면 애초에 전쟁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쉽게 후회할 거면 베냐민 사람들 다 죽이지 말고 어느 정도 남겨 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전쟁할 때 적당히 해야 했습니다. 누가 봐도 열한 지파와 한 지파의 전쟁은 체급 차이가 확연히 나는 전쟁인데 힘 조절하지 않고 화 풀 거 있는 그대로 다 풀어버리고, 정신 차려 보니까 지파가 없어지게 생겼네? 이럴수가! 이런 식으로 후회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 직전에 내몰린 베냐민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아내를 구할 수 있는 방편 두 가지를 마련해 주는데요. 첫 번째 방편은 미스바에서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인 야베스 길르앗 주민을 진멸하고 길르앗의 처녀 400명을 베냐민 지파에게 줍니다. 이렇게 해도 숫자가 모자르니 두 번째 방편을 마련해 주는데요. 여호와의 절기에 춤추러 나오는 실로의 딸들을 납치해서 데려간 다음에 아내로 삼아서 함께 살라는 방편을 마련해 줍니다. 이 방편은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납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0절과 21절 말씀에 나와 있는 내용이죠. 성경에 납치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 그 행위는 분명하게 납치와 동일한 행위입니다. 포도원에 숨어있다가 절기에 춤추러 나온 여인들을 잡아서 자기 땅으로 돌아간다? 이게 납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베냐민 지파는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문합니다. 만약 데려간 여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잘잘못을 따지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며 반문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이라 답합니까? 22절 중간 부분부터 보시면,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대충 읽으면 그럴싸해 보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서 달라. 뭐라구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죠. 이미 여자를 데려간 상태에서, 이미 아내로 삼은 상태에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무슨 군대처럼 선조치 후보고도 아니고,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처음부터 달라고 하면 되는데, 그건 맹세한 내용 때문에 말할 수 없으니, 일단 납치하고 보자는 겁니다. 그러다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은혜를 베풀어 달라. 너희가 주고 싶어서 준게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맹세한 내용을 지킨 거니까 걱정하지마라. 이런 식으로 설득하라는 겁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처리 방식이지만 결국 베냐민 지파는 납치를 통해서 아내를 얻고 회복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사기의 저자는 마지막으로 한 줄 평가를 남깁니다. 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아멘.
사사기 저자의 평가대로, 사사시대는 왕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이 생각할 때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직접 만들어주셨는데, 그렇게 번성하도록 인도해주시고 복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은혜를 무엇으로 갚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우상숭배로 갚습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 진지하게 여쭙고 기다리고 응답받아 행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해 버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채찍을 강하게 맞으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우상숭배하고 불순종하는 일들을 반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너무나도 잔인하고 수위 높은 사건들에 의해서 눈살을 찌푸리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기를 보면서 눈물 콧물 쏟아내는 감격적인 은혜를 체험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사기 말씀을 통해서 냉철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삶, 죄악된 삶에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시면, 그제서야 부르짖고, 그렇게 간신히 응답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불순종하는. 이 사사시대와 유사한 패턴이 우리 삶에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뜨뜨미지근한 신앙생활이라면, 언제든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사사들의 영적인 역량은 점점 더 떨어지고, 율법에 대한 지식도 적어 보이고 믿음도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디에 소망이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상황이 얼마나 선하든 악하든지 상관없이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나 사사들의 영적인 역량과 수준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님들께서 살아오신 세월들을 돌아보실 때, 편하시던 때가 있으셨나요? 매순간이 위기였던 때가 많지 않으셨나요? 이래서 뭐 되겠나. 싶은 때가 많지는 않으셨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느 시대든 편한 시대는 없었고 어느 시대든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선하고 탁월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권세를 잡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현실을 바라보며 비판적인 자세만 취하고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진단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 가운데 참된 소망을 품고 이 시대를 분별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사시대와 유사한 모습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날이지만, 어김없이 역사하시고,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오늘을 살아내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11월 1일부터 묵상해온 사사기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있게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겉으로 볼 때 너무나도 차갑고 암울하게만 느껴지는 사사기 말씀이었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 은혜 누리게 하시고 참된 소망을 품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주님,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대로 살아갔던 사사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이 성도들의 신앙과 믿음을 위협하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 악한 시대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원합니다. 이렇게 악한 시대일수록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지혜롭게 시대를 분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주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실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의지하오니, 주여 우리 모두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