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형통, 의인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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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총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시편 73편은 시편의 세 번째 책을 시작하는 서론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세 번째 책은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의 느낌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다른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첫 번째 책은 시편 1편으로 문을 엽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면서 1권을 시작합니다. 또 시편의 두 번째 책은 시편 42편에서 시작되는데요. 42편 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의 세 번째 책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73편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어떻습니까. 1권에서는 복 있는 사람, 2권에서는 갈급한 사람, 3권에서는 넘어질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지요. 1권과 2권은 읽기만 해도 은혜받을 것만 같은 서론이 등장하는데 비해 3권은 뭔가 조심스럽게 읽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편의 저자는 도대체 왜 3권의 가장 앞머리에 시편 73편을 배치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시편 1편과 시편 42편만큼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시편의 세 번째 책 가장 앞자리에 나오게 되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읽었듯이 73편의 저자는 거의 넘어질뻔한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 영적으로 시험에 들뻔했다는 것이죠. 어떤 이유로 시험에 들뻔했을까요. 그 이유는 3절에 나타납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다가 다른 어떤 지체와 트러블이 있어서 시험에 들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악인의 형통함 때문에 넘어질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73편의 저자는 단순하게 그저 악인이 잘 산다. 악인이 돈 잘 번다. 비싸고 좋은 집에 산다. 이런 식으로 악인의 소유만 보면서 배가 아파서 시험 들뻔한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넘어질 뻔한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73편을 쭉 읽어보면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이 외적으로 볼 때 얼마나 대단한지 그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4과 5절 말씀 보십시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악인의 형통함의 특징 첫째는, 평안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악인의 평안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아닙니다만 겉으로 볼 때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73편 저자에 따르면 악인은 죽을 때에도 고통 없이 죽습니다. 참... 이런 부분은 어떻게 보면 좀 불공평하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고 거만한 이런 악인들이 아무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뭔가 마음이 찜찜하고 불편합니다. 마지막이라도 좀 아프고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나쁜 사람은 결국 마지막에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거나 통쾌하게 복수를 당하거나 뭐 그런 일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편 73편에 따르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73편에 따르면 악인들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갑니다. 또 5절에 보면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악인들에게는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없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가진 것이 천문학적으로 많은 악인들이 고난과 재앙에 철저하게 대비해 놓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앙을 다 피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져서 혼줄을 내줘야 하는 악인들인데, 그들은 고난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73편의 저자가 몇몇 악인들의 인생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73편에 따르면 악인들은 그냥 하루 이틀 평안하게 산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평안하게 살고, 평생토록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죽을 때에는 고통 없이 평안하게 죽는다는 겁니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배가 아플 수 있죠.
이어서 악인의 형통함의 특징 두 번째는, 물질적인 번영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평안함이라는 특징에 비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쉽게 극복됩니까? 그렇지 않죠. 어지간해선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으로 돈을 굴리기 때문이죠. 요즘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근로소득으로 자가를 마련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단적인 예만 봐도 예수님 아무리 잘 믿고 신앙생활 뜨겁게 해도 정작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재산에는 크게 변화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시편 기자에 의하면 악인들은 점점 더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73편 7절 하반절을 보시면,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요즘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가는 죄다 오르는데 내 월급만 안 오른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이 격하게 공감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녀도,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해도 월급은 오르지 않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내 미래는 불투명해 보이는 이 차가운 현실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다시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이게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이 악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무슨 뭐 사기를 쳐서 재산을 불렸다거나 이런 경우를 배제하고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믿음이 없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73편에서 이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시키거나 약한 자를 착취한다거나 이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마음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른 새벽마다 눈 비비고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교회에 나와서 기도 생활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사는 나보다 저 믿음 없는 불신자가 훨씬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플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단순하게 불신앙이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와 공동체에 쏟아붓는 개인적인 열정과 노력과 수고와 헌신. 이러한 모든 부분들을 기회 비용으로 환산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무얼 합니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지친 육체를 회복하고 충전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까? 반면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행 다니고 휴식하고 충전하는 동안 무얼 합니까. 예배드립니다. 기도합니다. 헌신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관계 맺고 삶을 나눕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뒤집히지가 않는 겁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더 심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투정도 부려보고 떼도 써보고 그렇게 하다가 심할 경우에는 영적으로 시험에 들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저도 역시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이 불신자의 삶보다 훨씬 더 윤택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목사인 저도 우리 화평교회에 소속된 성도님들의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돈도 많이 많이 버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곳도 기도 한방에 순식간에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교회도 순식간에 부흥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또 73편의 결말도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반대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시편 73편 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평안과 번영이었습니다. 평안과 번영. 단어만 놓고보면 딱 봐도 신자에게 적용될만한 단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73편에 보니, 평안과 번영은 누구에게 적용되는 단어였습니까? 실제로 시편 73편 기자의 삶에서 악인들에게 적용되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러한 불신자들은 고난도 재앙도 다 피해가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고통없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죽어라 평생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그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실수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또 지체들 가운데서 죄책감 가지고 회개하고 관계 회복하려고 낑낑거리는데. 불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아무 고민 없이 너무나도 잘 삽니다. 심지어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악인들이 죽고 나서 지옥간다? 심판 받는다? 그 정도로 해결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사후세계야 뭐 갔다 와본 사람이 없으니 악인들이 아무리 지옥 간다고 한들 당장 우리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기에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시편 73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 고백은 너무나도 귀한 고백입니다. 악인들의 형통한 삶 때문에 걸려 넘어질뻔한 이 시편 기자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아 됐고 악인들 당장 심판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의 불의한 재물들 싹 다 압류해 주십시오. 피눈물 흘리는 모습을 봐야겠습니다.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일하십시오 하나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당장에 벌하지 않으시더라도 그저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갑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적당히 하나님 믿고 세상과 양다리 걸쳐서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은 가면 갈수록 악인들의 형통이 더욱더 심해질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까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때로는 악인들의 형통함 때문에 우리 속이 쓰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편 73편 기자의 고백처럼, 악인들이 심판 받는 모습만 고대할 것이 아니라, 불을 쏟아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으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으로 인해 영적인 시험에 들어서 넘어질 뻔하더라도, 다시 마음의 중심을 잡고,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 된 삶을 온전히 감당하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해 함께 상고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시대적으로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교회 숫자가 줄어들며, 한국교회 신자의 숫자가 줄어드는 이러한 때에 악인들의 형통함에 대해 고민하고 또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와 비교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탓하며 제한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아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영적인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며,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