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구와 응답
Notes
Transcript
오늘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포로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정체성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며 신앙생활 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를테면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세 번 기도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지키거나 가정에서 지키는 방식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교회에 가지 못하고 가정에서 신앙생활하는 것과 유사하죠. 물론 요즘은 영상으로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기에 비할 바가 못되긴 합니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운 것에는 또다른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벨론에 존재했던 우상숭배 문화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희생제사를 드리는 방식이나 절기를 지키는 방식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뭔가 고급져 보이는 종교 생활과 문화가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사고에 따르면, 각 나라가 섬기고 있는 신들의 힘의 차이가 전쟁에서의 승패를 가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상황들이 남유다 백성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간절한 탄원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팔과 깨어나서 능력을 베풀어달라는 간청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기억합니다.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오랜 시간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이라는 강대국으로부터 출애굽시키셨습니다. 전쟁이나 반란을 통해 해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는 이스라엘이 기여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가장 깊은 곳을 마른 땅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과거에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일어나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우리말 성경에서는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뉘앙스를 살려서 읽으면, 나 곧 내가 너희를 위로하는 그이니라.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이다. 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실재가 얼마나 높고 큰 지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며 비교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주위 상황이 최악의 상황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주위를 둘러 볼 때 온갖 우상숭배가 자행되고 있고, 하나님께서 패배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처럼 판단될지라도 그것은 좁은 시각과 얕은 생각에 좌우되는 사람의 오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바벨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힘으로 압도당했고 포로로 잡혀왔으며 자신들의 목숨이 바벨론에 달려있으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인데 너는 누구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또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 창조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바벨론을 두려워했습니다. 13절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대자의 분노를 항상 종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상황과 환경이 그러하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무슨 귀신을 보고 무서워서 벌벌 떠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해하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분임을 강력하게 신뢰하면서, 그러한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이든 능히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상황과 환경에 쉽게 영향받고 위축됩니다. 코로나 사태가 1년 6개월 이상 종식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코로나 사태를 한방에 잠재워 주셨습니까?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그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깔끔하게 소멸시켜 주셨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십니까? 자연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영향력을 보이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도 그렇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 백성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포로기가 끝나길 바랬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탄원을 올려드렸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기는 선지자의 간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분이어서가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기 원하신다면, 그것이 올바른 방식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결과적으로는 남유다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집니다. 결박된 포로가 놓일 것이고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식이 부족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을 놓고 생각해 보면, 바벨론 포로기 70년 가운데 죽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사슬에 묶인 채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4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포로기의 속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로기 속박에서 해방을 넘어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일은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도 있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겪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은 코로나처럼 내 잘못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일들도 다가오지요. 이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벨론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적인 생각과 믿음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또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분의 일하심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뭘 해도 빨리 빨리해야하는, 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요즘 세상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속터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예측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님들, 보이는 상황과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욱더 경외하시고 그분의 뜻이 이 세상과 내 삶 가운데 이루어져 가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며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경외심과 믿음의 기다림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품게 되었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쉽게 위축되고 휘둘리는, 믿음 없는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언제나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초연한 마음을 품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의 삶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