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센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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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환상의 골짜기, 곧 예루살렘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22장 초반부의 분위기를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매우 들떠있습니다. 22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함인고 라는 번역은 굉장히 점잖은 번역입니다. 사실 어찌함인고 라는 말은 어떤 행동이 부적절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너 대체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이런 식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볼 때 무엇이 문제라는 겁니까? 지붕 위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은 일반적으로 평평한 지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평평한 지붕이 집에서 가장 넓은 장소였기 때문에 지붕 위에서 쉬거나 잔치를 벌이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다시 1절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볼 때 예루살렘 백성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다같이 모여 잔치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잔치하는게 왜 문제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패퇴한 뒤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어떤 시대에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 전쟁한다면, 그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강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이 원칙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적군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기 때문에 패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백성들은 자축하기에 바빴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기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 더 이상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지 등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그분의 은혜로 건져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떤 것인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잔치판을 벌이면서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왜요? 내일 죽을 거니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은 태도이지요.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사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나를 위해 살아야한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믿는 사람은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품으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어떤 마음을 품었어야 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앙망함과 경외함에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서 22장 8절부터 11절까지는 유다 백성들이 전쟁을 대비하는 과정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곧 닥칠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해 방어수단만 점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는 어떤지, 성벽 상태는 어떤지, 급수 시설은 문제가 없는지 점검합니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고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도 그걸 원하진 않으십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은 해야겠지요. 무기? 점검해야지요. 칼에 날이 섰는지 방어구는 제 기능을 발휘하는지, 성벽은 견고한지, 포위당해도 물을 끌어올 수 있는지 잘 봐야지요. 하지만 그 점검하는 과정 가운데에도 임하셔서 지혜롭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게, 실수하지 않게 능력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해야 하고 유다를 존재할 수 있도록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경영하신 하나님을 공경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전쟁을 대비한 뒤 멸망 전야의 파티를 준비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지요.
둘째는 진심어린 회개의 회복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1장에서 이미 쓸모없는 무의미한 종교 의식을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 하나님을 향한 진심어린 마음이 없이 드리는 모든 기독교적인 종교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서 1장이나 22장이나 여전히 동일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 22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이 아닌 환상의 골짜기 예루살렘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유다는 전쟁에서 한 차례 승리했으나 그것이 주님의 은혜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이들은 그저 지붕위에 올라가 자기들의 승리를 자축하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처럼 소와 양을 잡아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깁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기와 방어구, 성벽이 견고하면 그만입니다. 수로를 통해 물만 공급받을 수 있다면 걱정이 없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직장만 잘 다닐 수 있으면, 건강하게만 살 수 있으면, 돈만 많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그 어떠한 재앙이 닥치더라도 믿을 구석이 있고 비빌 언덕만 있으면 하나님이고 자시고 필요 없는 겁니다. 막말로 내일 죽더라도 괜찮은 겁니다. 자기를 위해 살아왔고 후회 없는 삶이라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 나는 유다 백성과 같지 않은지, 지금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옛적부터 지금까지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경영하시며 복 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주님을 앙망하고 경외하며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른 새벽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길 원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도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유다 백성들같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경외하며 앙망하길 원하오니 주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