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가중시킨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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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체 왜 출애굽 해야만 하는지, 이에 대해 바로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길 소망합니다.
먼저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명령하신 것은 간단합니다. 나의 백성을 보내라. 이스라엘인들을 보내라. 히브리인들을 보내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의 백성을 보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민족들 중에 하나가 아닌 특별한 존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려는 두 번째 이유는, 절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어하니까, 괴로워하니까. 노동력 착취를 당하니까 그냥 도와줘야겠다. 이 정도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 절기를 지키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무슨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이런 날이 절기니까 다른 날은 몰라도 그 절기만큼은 지켜야 돼. 이런건 아닙니다. 절기라고 했으니까 절기예배로 여길 수 있지만 절기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매주 예배드리는, 주일성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바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2절 말씀 보세요.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의 반응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오만과 도전, 모욕의 뉘앙스로 읽는 것입니다. 나 외에 어느 누구도 명령할 수 없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말하는 주인은 누구인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바로가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정말 몰랐다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요. 우리 박윤선 목사님의 경우에는 첫 번째의 해석을 지지하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여기 나온 바로의 말은 극히 교만하다. 첫째는 하나님을 무시함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노예로 매어 두려고 함이다. 바로의 교만에 대해 알려주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능력의 위대하심을 더욱 깨닫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교만한 폭군도 제재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저 역시 박윤선 목사님의 해석을 지지하는데요. 바로의 이런 완악함과 강퍅함이 불러오는 참상이 뒤에 열 재앙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가 하나님을 알았든 몰랐든, 그가 가지고 있는 교만함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좌우지간,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거절당하자마자 돌아서지 않고 한번더 요청합니다. 1절에서 요청한 것에 비해 훨씬더 부드러운 어조로 바로에게 요청하는데요. 3절 말씀 보세요.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아멘.
1절에 생략된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이렇게 겸손한 어조로 바로에게 요청하지만 그 요청은 처참하게 묵살 당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연결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존에 노역하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드릴 시간은커녕 일하는 과정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애초에 애굽에 갈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모세는 아예 애굽을 떠난 사람입니다. 애굽의 왕족이었으나 그 신분을 버리고 도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애굽에 제발로 갈 일이 있겠습니까? 그럴 리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직접 부르시고 모세를 직접 보내시고, 그 과정 가운데 상세히 간섭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완수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기는커녕 훨씬 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출애굽기 4장 29절에서 31절 말씀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살피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위로받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깊은 분노를 품게 됩니다.
하루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나님께 높여드렸다가, 다음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반대의 태도로 돌변해 버리죠. 이는 마치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다음날에 곧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과 세상의 반응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하였고, 실제로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께서는 그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생각할 때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어주셨다고 했는데,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됐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가. 왜 상황이 더 악화되는가. 하나님 뭐하고 계시는가. 이렇게 따지듯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침묵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떨는지 잠잠히 기다리고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귓가에 음성으로 말씀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나타나서 일하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상황에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며 지혜롭게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친숙한 말씀이지만,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더라도 상황이 부정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뜻밖의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그런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며, 오히려 더욱 굳센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모든 우리 화평의 지체들 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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