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의 멍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역대기 저자는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요시아, 이 세 명의 왕만 다윗의 길로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여호사밧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 요시아와 더불어 여호사밧에 대해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저자는 여호사밧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7장에서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 유다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종교적으로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으며, 바알들에게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또한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했으며,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보내서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사방에 두려움을 주셔서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유다에 조공을 바치는 상황으로 인도하셨고 그 결과 유다는 크게 부강하게 되었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호사밧은 굉장히 큰 과오를 범합니다. 어떤 잘못이었습니까? 역대하 18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아멘. 말씀 상으로는 여호사밧이 잘못했다거나 죄를 범하였다는 식으로 언급되어있진 않습니다만, 열왕기하 8장 18절에 의하면 여호사밧이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왕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람 왕이 자신의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 자기의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합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람 왕이 아합의 딸과 결혼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이 서로 뜻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엄청난 지도력을 보인 여호사밧 왕의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자식 결혼의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결혼을 통한 동맹은 고대 세계에서 전형적이었으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결혼동맹은 이전에 적대 관계였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역할을 했죠. 여호사밧 왕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통치하던 때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오십 년동안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아합의 가문이 아무리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타락한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아합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은 외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동맹을 위한 결혼은 어떤 대가를 치루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동맹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미 솔로몬 때에도 주변 국가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우상숭배가 만연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믿음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효력이 있고 그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 준다 한들 득보다 실이 훨씬 큰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악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린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덕분이지 자신의 능력이 월등해서 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는 아합이 하나님의 길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아합과 손을 잡아 전쟁을 치룹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한다고 하죠. 그러자 아합은 어떻게 합니까. 선지자 400명을 모아 예언을 받습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백 명의 선지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품어야만 합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여호사밧은 사백 명의 선지자들을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셀만 하틴이라는 구약 학자는 이 사백 명의 선지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일종의 정부 부서를 형성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무리에 속했을 것이다.”
셀만 하틴의 진술에 따르면, 이 사백 명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냐는 여호사밧의 질문에 아합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7절 말씀 중간 부분을 보시면,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본인에게 나쁜 일만 예언한다는 이유로 물어보지도 않으려는 것이죠. 왜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이 그저 자기의 뜻에 반대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예언만하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겁니다.
하지만 여호사밧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가야를 데려와서 여러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데, 이 부분도 굉장히 이상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여러 선지자들이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어디에서 예언합니까?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예언합니다. 공개적인 장소, 드넓은 장소에서 예언하라고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공개적인 이미지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이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남유다에서 선한 왕으로 기록된 여호사밧 왕은 한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인척관계를 맺은 우를 범한 것이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우상숭배하는 왕과 인척관계를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외적으로는 착한 외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영적으로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좋아 보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이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어떠한지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람의 눈과 보여지는 결과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언 받고자 하는 눈에 보여지는 위선적인 행위들은 우리 안에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든 말로든 범죄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항상 기억하며 주님의 뜻과 방식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악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주님 보시기에 능력이 부족한 우리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는 삶을 체험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교만하거나 자만해져서 실질적인 이득만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고 모든 일에 신중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주님의 양 무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