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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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9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얻게 될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이사야 7장에서 시작된 내용인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의 징조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하는 단락입니다. 앞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두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이름을 통해 미래의 사건이나 상황들을 표현해 냈습니다.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뜻의 스알야숩과 노략이 임한다는 뜻의 마헬사랄하스바스.
그런데 9장에서 선포하는 예언의 메시지는 스알야숩이나 마헬살랄하스바스와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9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전까지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두움이 없을 것이라 선포합니다. 어떤 어두움인지, 이 어두움이 왜 임하게 되었는지, 왜 고통받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받던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절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큰 빛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그 빛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그 빛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습니다. 이 백성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로 주저앉아 있거나 사망의 그늘진 땅에 절망적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빛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빛이 임한 사건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말로도 이 일은 미래에 일어날 것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로 볼 때 여기에 사용된 동사 시제들은 모두 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부르는데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무조건 확실하게 일어날 일 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침울하고 암담하다 하더라도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큰 빛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빛이 비추는 것으로 끝이 날까요? 3절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더해주신다고 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서 어떠어떠한 즐거움을 어떻게 누린다.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있지는 않아서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가난함 대신 창성함이, 슬픔 대신 즐거움이 이 백성들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희망 찬 메시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주된 문제는 빛이냐 어둠이냐 즐거움이냐 슬프냐의 문제가 아닌 전쟁이라는 물리적인 힘에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5절 보십시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적과 아군이 뒤엉켜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전투화와 겉옷이 불살라집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쟁하는 자들의 무기들까지 다 살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축을 울리며 전진하던 그 전투화들은 사라지고 전쟁은 땅 끝까지 중단될 것입니다.
또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6절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아멘.
온 세상의 전쟁이 어떻게, 왜 끝나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해결책과 정답은 바로 한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해 가시는지 그 방법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는 것, 온 세상의 전쟁이 끝이 나는 것,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빛이 비추이는 것. 이 모든 일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7절 제일 뒷부분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권태에 빠져 영원이란 시간을 어떻게 허비할까 고민하면서 게으르게 지내다가 인간이나 한번 구해줄까?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구원해주는 그런 성의 없는 싸구려 구원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을 다 허비해가면서 구원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만, 흑암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일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열심히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정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비록 죄에 대하여 불같이 노하기도 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인생의 채찍을 들기도 하시지만, 결국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 열심과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사랑이 죄와 사망의 늪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니, 비록 상황이 어렵더라도 주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굳건한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살아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아멘.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한없이 악하고 연약한 우리이지만, 구원받을 자격 하나 없는 우리이지만, 주님의 사랑과 열심으로 우리를 붙드시며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오니, 주여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