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가운데 품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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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편 1절 말씀을 읽으면 이 시편이 슬픔을 노래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읽어 나가다보면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대해 찬양하는구나, 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본 시편은 확신의 시편, 신앙고백의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오늘 이 시간 시편 16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시인이 어떠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확신을 갖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정확히 어떤 사람들과 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피합니다. 그리고 나서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아멘.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이 말은 주님 밖에는 나에게 그 어떠한 복도 없습니다. 나의 복이 사실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복이 없다는 고백은 십계명의 첫 번째 명령,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배타적인 요구와 철저하게 일치됩니다. 시인은 하나님 여호와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만 믿습니다. 다른 그 어떤 것에도 복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치명적으로 매력적이며 매혹적인 혼합주의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바알, 아세라, 엘 등의 우상들의 성일에 그 신들을 경배하고 제사 지내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혼합주의가 시인이 살고 있던 시대에 팽배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혼합주의자들은 피의 전제를 드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피의 전제란, 아마도 자녀들을 희생제사로 바쳤던 일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러한 혼합주의가 유일신 사상으로 시작되었던 이스라엘을 잠식해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의 신보다 두 명의 신이 낫고 세 명의 신이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애시당초 동의할 수 없고 공감할 수조차 없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종교관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우상에게 자신의 자녀를 피의 전제로 드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도 예배했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식의 제사는 유행처럼 번져있었고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복 받는 길이라 생각했지만 시인은 피의 전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오직 하나님 한분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 16편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 16편을 기록한 저자가 레위 제사장이라 주장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6절 말씀은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특별히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이시기 때문에 따로 레위 지파만의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시편 16편의 저자가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라면, 시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땅이 없는 사람이었고 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계층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땅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다.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시인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기업, 그의 구역이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한분만이 시인의 산업이며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유형의 땅이 아니라 무형의 땅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매일 같이 눈으로 보며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의 전부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신앙, 그의 믿음, 그의 확신은 아래의 구절들에서 구체화 됩니다. 시인은 그가 믿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는데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아멘.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송축한다고 합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율법들로 인생을 인도받는 그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훈계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과 행동들을 할 때 즉시 우리 귓가나 우리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그 깨닫게 하시는 과정은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회개를 하고 나서도 자꾸만 자꾸만 죄에 대해 친화적인 우리의 악함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라, 하지말라. 이런 말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을 읽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순종이 되고 납득이 되고 헌신이 되는 부분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죄악 된 인간의 한계이며, 은혜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말씀으로 자신을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은 밤마다 양심이 자신을 교훈한다 말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고 우리의 죄성을 깨달을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심어린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긍휼히 여겨주심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나아갈 때 효과적인 회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야만 9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아멘. 이 말씀에서 시인은 자신이 체득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일에 대해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편 16편의 시인이 만약 제사장이라면, 그는 가진 땅도 없고 이스라엘의 제의. 제사 의식이 혼합주의적인 우상숭배로 변질된 상태에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며 어려운 상황에서 온전히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할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다원주의가 이 땅에 스며든지 오래되었고 비기독교적인 사상들과 지탄받는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 이러한 악한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는 시인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른 예배와 바른 신앙생활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비록 현실은 어둡고 어려워 보이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을 온전히 바라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부디 오늘 하루도 시편 16편의 시인처럼 우리를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송축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히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 땅과 전 세계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바라고 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기대하는 일이 없었겠지만, 어려움들을 통해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의 주님, 악하고 타락한 시대 가운데 반기독교적이며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상들에 휩쓸리지 않게 하시고 혼합주의처럼 물질적인 복만을 위해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양심으로 스스로를 깨끗이 씻고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주장하여 주시옵고 주님의 의롭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