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헤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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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은 죄인들을 찾아서 회개시키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세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제 받은 말씀에서는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되찾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말을 하는데요. 혹시 잘 기억나지 않는 분이 계실까 해서 짧게 내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버릇없고 불효자처럼 느껴질 수 있는 요구였지만 아버지는 선뜻 유산을 내어줍니다. 어떤 형태로 유산을 넘겨줬는지 알 수 없지만 둘째 아들은 유산을 현금화해서 먼 나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전재산을 탕진하게 되죠. 그 후에 심한 흉년이 찾아와 둘째 아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둘째 아들은 여기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품꾼으로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품꾼이라는 말은 일용 노동자를 의미합니다. 매일 매일 필요에 따라 고용되는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고용되는 품꾼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고 가장 낮은 신분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일용 노동자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하려 한 것입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먼 나라를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20절 중간 부분 보시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얼마나 먼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즉시 알아차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즉시 달려가 불쌍히 여기며 환영합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가 지은 죄가 있기에, 품꾼 중의 하나로 여겨달라 요청하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후레자식이라 욕먹어도 아깝지 않을 둘째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모든 것을 녹이고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들을 안아주고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은, 부모의 사랑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기쁨이 넘치는 축제로 연결됩니다. 대속죄일과 같은 중요한 종교적인 절기에 잡아먹는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고, 악기들의 연주 소리와 흥에 겨워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둘째 아들의 불효막심한 모습에서 회개하고 돌아온 기특함과 이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흐뭇하게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동적인 내용 뒤에 또 다른 내용이 전개됩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되는데요.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과 달리 지금까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에 첫째 아들은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갑작스레 잔치가 왜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춤추고 흥에 겨워하는지,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종 한 사람을 불러서 물어보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지금까지 둘째 아들은 바깥세상에서, 먼 나라에서 흥청망청 모든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자기가 벌어서 모은 재화가 아닌 생존해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것이었죠. 이때 첫째 아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 28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있고 첫째 아들은 바깥에 서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런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데리러 나옵니다.
잔치가 한창 진행 중인 집에서 밖으로 나와 첫째 아들에게 다가가서 잔치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에서도 아버지는 먼저 행동하죠. 윽박지르거나 자기의 마음을 몰라 준다며 서운다하고 화내는 것이 아닌, 아들을 인격적으로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아버지에게 항상 신실했지만 반대로 아버지는 자기에게 관대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둘째한테는 이렇게 하고 저한테는 이렇게 하시는데, 과연 이것이 옳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노예처럼 섬겨왔고 아버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해 왔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창녀들과 놀고 먹으며 돈 다 날려먹은 둘째 아들을 어떻게 이렇게 환대하실 수 있습니까. 정의와 공의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다. 그러니 속상해할 것 없다. 이런 의미겠죠. 또 무엇이라 말합니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의 말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중에, 앞에 있는 두 가지는 굉장히 짧고 간결합니다. 잃었던 것을 되찾았으니 아니 기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세 번째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끝이 깔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란 작가가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명확하게 끝맺지 않고 독자들이 작품의 결말을 상상하도록 하는 마무리 형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으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아버지의 말로 끝납니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흥겹고 기쁨이 넘치는 잔치가 진행 중인 집 안이 아닙니다. 집 밖에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첫째 아들을 사랑으로 다독이며 같이 들어가자. 같이 기뻐하자 설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권유로 첫째 아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심호흡하며 화를 가라앉히고 아버지와 어깨동무하고 웃으며 집안에 들어갔을까요? 그렇게 들어가서 동생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주며 잘 돌아왔다고 반겨주는 따뜻한 우애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을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하지만 결말은 이야기꾼이 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동에 따라 이 이야기의 결말이 정해질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 따라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 엔딩일지 배드 앤딩일지 결정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을 쥐게 됩니다. 관계를 맺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 중심에 서게 되고 이런 일 저런 일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첫째 아들로 살아가게 되죠. 그러다 보면 수많은 둘째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죄인, 저런 죄인들이 신앙생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들이밀다가 상처받고 교회 떠나고. 아니면 갑자기 은혜받았다며 호들갑 떨면서 은혜 충만한 사람인 양 행동하기도 하고.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때로는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망각하고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매번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주일 예배 다 참석하며 살아왔는데. 기도도 매일 얼마나 하는데, 저딴 죄인이 저렇게 순식간에 은혜받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나한테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시던데? 살진 송아지는커녕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잡아주시던데? 이것과 마찬가지이죠.
우리는 첫째 아들처럼 씩씩거릴 수 있지만 결국 선택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에 따라 잔치하는 집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동생과 우애를 회복하고 함께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집 밖에서 혼자 씩씩 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부디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 일인지 공감하시길 바랍니다. 질투를 느끼는 첫째 아들이 아닌 함께 기뻐하고 공감하는 주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아무리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더라도 이생에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간혹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기보다, 첫째 아들처럼 타인을 보며 질투를 느끼고 하나님께 오히려 서운함과 섭섭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장 어떤 역사를 보여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슴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계획과 섭리를 신뢰하며, 질투하고 화내는 첫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데 앞장서는 우리가 되게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듯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때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