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과 많은 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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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의 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몸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고,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말한다면, 통일성 보다는, 몸을 구성하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12장 말씀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12절부터 31절까지의 내용을 기록하면서 한 몸과 여러 지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요,성도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몸과 지체 개념은 교회로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이 몸과 지체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많은 지체는 한 성령으로 인해 한 몸이 되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아멘.
특정 교단이나 어떤 분들의 경우에는 이 구절을 보고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마신다 라는 부분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행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렇게 행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는 거룩한 영이며 돕는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았든 마셨든 어떻게 했든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가 어떻게 표현되었든 우리는 그 행위와 관련시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성령을 받았다? 어떻게 받습니까? 성령을 마신다? 어떻게 마십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면 마셔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기운을 흡수하듯이 성령을 흡수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어떤 방식으로 받느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성령으로 많은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구절에서 성령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성령으로” 라는 말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 으로써 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시 13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놈이든 상관없이, 출신성분이나 계급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하나의 성령으로써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지체들이, 많고 많은 지체들이 하나의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 됨, 통일성의 근원은 바로 성령에 있다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등록카드를 작성했기 때문에 한 몸이 되었다? 혹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같은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 몸이 되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등록카드 작성이나 같은 교리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따라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이유,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 한 몸으로써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성령 하나님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리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용납할 수 없게 됩니다.
20절과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눈으로 보지 못하면 손으로 정확하게 만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손이 없으면 눈으로 보더라도 느낄 수 없습니다. 뇌가 지시하지 않으면 발의 기능이 정상이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발이 기능을 상실하면, 뇌가 아무리 지시를해도 움직일 수 없겠지요. 누가 누구보고 쓸 데 있다 쓸 데 없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이것 저것 섬기는 일들을 많이 감당하다 보면, 이러한 신앙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이 내게 어려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인 미성숙함이 나에게 상처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 라고 선언합니다.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어렵고 상처받을 수 있지만, 성령으로 인해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 됨을 이루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분쟁 없이 서로 돌보는 지체들의 역할입니다.
사도 바울이 12절에서 20절까지 몸의 하나 됨을 강조했다면 24절부터 26절까지는 지체들이 서로 돌보는 것에 대해 강조합니다.
24절과 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아멘.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지체는 지체로서 자기의 기능만 다한다고 해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약한 지체를 돌봐야만 합니다. 홀로 그 짐을 다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지체가 함께 유기적으로 유동적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체의식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선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교회에서 모이기 어려워지니, 지체가 지체된 역할을 잘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지체가 어떠한지 알 길이 없습니다. 돌봐줄 길이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만, 이 자리에 모든 지체가 다같이 모여 예배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다시 모이게 되면 어떤 부분들을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지체와 한 몸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지체의 하나 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된 이유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념으로는 하나가 되었지만 외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하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재능, 지식수준, 삶의 질 등등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을 찾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여러 지체가 연약한 지체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어떤 지체입니까? 연약한 지체입니까? 아니면 은사와 재능이 풍부한 지체입니까? 저는 아직 성도님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화평의 성도님들 대부분은 뛰어난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보다 뛰어난 부분이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더욱 섬겨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연약한 지체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체가 고통 받으면 함께 고통 받고 기뻐하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케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지체된 사명임을 기억하시고 작은 것 하나 하나 실천해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지체로서 교회의 하나됨과 통일성을 이루어가는데 힘쓰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교회 내에 존재할 수 있는 분쟁을 최소화 시키고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를 지탱하며 연약한 지체를 돌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자기의 욕심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지체를 위해 사용하게 하시며, 주님의 영광 위해 사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힘주시고 능력주실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