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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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그 어떠한 희생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8장에 의하면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향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34절 앞부분 보시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무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34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라는 말은 대상이나 자격조건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정인을 위해 특별한 자격을 따로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도, 제자가 되는 방법, 제자가 되는 길의 필수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일텐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마가복음 8장 27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쉽게 말하면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예수님 당신의 발로 직접 걸어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따라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가는 길,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 한발자국 가까워지는 길 가운데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신 내용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은 고난과 환난을 인내하면서 단순히 참아야 한다는 권고에 길들여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얘들아. 나를 따르려면 아주 아주 많이 힘들거야. 마치. 너희들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나를 따라오는 것과 같이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울거야. 그래도 따라오겠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이 맥락에서는 주로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진다. 죽음을 불러오는 그 십자가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는 장면을 목격하며 성령 임재를 경험하고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되기도 하고 선교사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 세계를 누비다가 순교하거나 기독교를 탄압하는 자들에 의해 순교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었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기도 하고 톱으로 목이 잘리기도 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값어치 없는 헛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순교하는 그 순간에 이 말씀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님들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협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재기 시작합니다. 철저하게 계산하게 됩니다. 이건 아니지. 이정도는 어렵지. 또는 이정도는 할 수 있지. 이건 가능하지. 이런 식으로 세상과 교회 사이에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나만의 자기 십자가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만족합니다. 그것이 자기만의 십자가라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피 묻은 십자가입니다. 영광스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고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치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탄압이 없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나라에 살다보니 이제는 신앙의 자유가 당연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누린지 불과 100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일제와 공산당의 종교적인 탄압을 목격하고 체험한 한 두세대 위의 어르신들이 천국에 가시기 시작하고, 이제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마음대로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짊어주신 십자가가 아닌 내가 만든 질만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라 착각합니다. 피묻은 십자가는 발로 걷어차고 영광스러운 빛이나는 십자가를 멋들어지게 어깨에 메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이 아닌가 스스로를 말씀 앞에 세워서 비추어보고 경계해야만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신실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고 어색하고 힘들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단락에서 베드로는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른 새벽부터 무거운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씀만 해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반환점을 돌아 죽음을 향해 가시는 길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성도님들 스스로를 삼위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고 계신지요.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피묻은 십자가, 지기에 너무나 무거워 괴로운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따라가고 계신지요.
우리는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편안한 인생을 보장 받기 위해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부르심 받은 거룩한 무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나를 부인하고 있는지, 나는 나의 어떤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시면서 다시금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고 눈먼 자를 고치며, 저는 자를 걷게 하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 이유를 알기 원합니다. 그렇게 고침 받은 자들처럼 우리도 이 악한 세상 가운데 편하게 살기 위해, 남들보다 쉽게 살기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이 아님을 깨닫길 원합니다. 부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교회 내에서, 공동체 내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기를 부인할줄 아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고,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진정한 제자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