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능력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0 views
Notes
Transcript
본문 : 요한계시록 3:7-13
제목 : 작은 능력
미국 언론 매체인 뉴욕 타임즈에서 한국의 현재 코로나 상황에 대해 이런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가장 엄격한 방역 정책을 펼쳤던 한국이 확진자가 급증한 현재 집단적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은 일일 확진자가 수십에서 수백명일 때는 거리가 텅 빌 정도로 영업시간과 사적모임 등을 제한했다.”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된 배경은 폭발적으로 급증한 코로나 확진자 숫자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현재 상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미 코로나 누적 확진자 숫자가 천만명을 넘었으니까요. 다섯 명 중에 한 사람 정도다. 감기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왜 이런 예시로 말씀을 시작하는가 하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볼 때, 코로나에 대해서 집단적 무관심이 발생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집단적인 무관심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영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는 사태가 이미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박해의 시대 가운데 발생한 문제가 아닙니다.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과 노력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우리 믿음이 연약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식으로 너무나 가볍게 회개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채로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함께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은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다시금 우리의 신앙적인 열정을 회복하고 결단하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자세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빌라델비아 지역은 오늘날 터키의 알라쉐히르라고 불립니다. 이 지역은 터키의 성지순례 또는 성경지리 답사의 코스 중의 하나인데요.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성경지리 답사를 목적으로 터키에 다녀오신 분들은 아마 한번쯤 방문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인데요. 이 빌라델비아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라고 불릴 정도로 무역의 통상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빌라델비아의 토양은 굉장히 비옥해서 포도 농사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빌라델비아는 농업과 상업의 발전으로 굉장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빌라델비아는 굉장한 자연조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진으로 인해 고통받은 지역이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ad 17년에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이 대지진이 소아시아 열두 개의 도시를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빌라델비아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이후로도 매일같이 여진이 발생해서, 건물 안에 있으면 날마다 벽돌 조각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러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겠죠. 어디 편안하게 누워서 잘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열악한 환경 때문에 비옥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주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진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심각해지자 로마 황제는 빌라델비아 지역에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무려 5년 동안 로마에 바치는 조세를 면제해 준 것이죠. 이러한 특단의 조치를 통해 빌라델비아는 로마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지진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하게 됩니다. 그러니 빌라델비아 지역 주민들은 로마 황제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3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빌라델비아 교회가 말씀을 받는데 말씀하시는 주체가 누구십니까?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 보통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기록되어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뭔가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7절 말씀을 보면 한 줄로 쭉 연결해서 나열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을 보면 하나씩 구분해서 나누어져 있는데요. 7절을 직역하자면,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께서 말씀하신다.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느껴지십니까? 마치 하나님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성육신하셔서 제자들과 3년 동안 공생애 활동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엄청난 기적들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의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처럼 느껴집니다. 요한계시록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분들의 경우에는 7절에서 말씀하시는 주체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가 굉장히 단면적이고 단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에만 사용되는 수식어, 거룩하다는 수식어와 참되시다, 진실하시다 라는 수식어가 예수님께 붙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됩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라는 말은, 다윗 가문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 가문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우주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표현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동등한 권세처럼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표현 한 가지를 더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데, 그 구원의 문, 천국의 문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 7절의 예수님의 모습이 성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속성과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는데요. 이렇게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시고 참되시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천국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 상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고 그 권세를 행사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열려있는 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의미합니다. 이 문은 언제가 닫힐 수도 있는 그런 문이 아닙니다. 이 문은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닫을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열려있는 문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린 문을 빼앗길 일은 없습니다. 굉장한 말씀이죠.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말씀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예수님께서는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을 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3장 8절 하반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3장 8절 하반절을 직역하자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화면) “...왜냐하면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나의 말을 지키고 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의 열려 있는 문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능력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작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크기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죠. 헬라어에서는 길이를 표현할 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크기가 작거나 길이가 짧을 때 사용되는 단어죠. 그런데 독특하게도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작은”이라는 말은 “사소한, 하찮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자 그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했죠. 그런데 이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시고 참되시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주권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했죠. 이런 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려있는 문을 주셨습니다. 어떤 근거로 주셨습니까?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보셨을 때 객관적으로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작은, 그렇게 작은 영적인 능력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린 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델비아 지역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상숭배가 심각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두에 빌라델비아 지역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지진이 너무 심해서 땅이 황폐해지니까,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조세도 5년씩이나 거두지 않는 그런 특별 대우를 해주면서까지 빌라델비아 지역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했죠. 이렇게 큰 도움을 받으면 로마 황제에 대해서 친화적인 도시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로마 황제를 반대하는 도시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친화적인 도시가 되겠죠. 그래서 이 빌라델비아 지역 주민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서 신전까지 세웁니다. 안 그래도 로마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나라였는데, 빌라델비아 지역 주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무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너나 할 것 없이 로마 황제를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 지역이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술의 신 디오니수스를 가장 많이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무슨 뭐 아데미 아나이티스, 아데미 에페시아, 헬리오스, 제우스, 아프로디테 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우상들이 공존했습니다.
자, 이러한 상황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하찮을 정도로 작은 능력, 쥐꼬리만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영적으로 뜨겁게 살아가는 것,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목표에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열심히 할 마음도 없을뿐더러 우리 마음에 신앙적인 열정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께서 편애하셔서 다른 교회와는 다르게 매일 매일 성령 충만함을 주셔서 이렇게 칭찬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문을 열고 닫으시는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너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뭐 율법주의적으로 지켰느니 안 지켰느니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 황제 숭배와 이교도 우상숭배와 유대인들과의 종교적인 갈등. 이렇게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상태에서 행위로 지켜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겁니다.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쁜 마음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편한 방식대로 현실에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하고 교회와 지체를 병들게 하는 악하고 나약한 신앙생활을 눈감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는 유대교에서 출교당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출교당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출교는 해당 교회에 출입하지 못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유대교에서의 출교는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공동체에 소속될 수 없고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회당에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 죽은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의 교제의 문이 닫힌 채로 살게 되고, 또 회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채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누군가 나의 권리를 억압하고 사회적인 입지를 강제로 축소 시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러한 사회적인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냥 한두 번 해보고 아 안 되겠다. 이렇게는 못살겠다. 하고 때려치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 전체가 예수 때문에, 그놈의 믿음 때문에 끊임없이 손해 보고 이유 없이 미움받고, 왕따 같은 삶을 감내해야 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1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줄게. 라는 응답의 말씀이 아니라 앞으로 너가 이렇게 이렇게 해야 돼. 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발칙한 상상이긴 합니다만, 제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제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당장에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 같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있지 않습니까?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문제라든가, 디오니수스를 숭배하는 문제라든가. 유대인들과의 갈등 관계라든가. 이런 어려운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1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11절 말씀을 실제로 받았다고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제 됐어. 그 정도면 고생 많았어. 잘했어. 이제 좀 쉬어. 이제 너도 좀 누려.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런 말씀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결국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하찮게 느껴질 정도의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더 버티라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치과에서 스케일링 받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박성호 장로님 계시는 자리에서 이런 예시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치과에서 치석 제거할 때, 이런 얘기 합니다. 불편하시면 오른손 드세요. 마음같아선 치석 제거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오른손을 들고 싶습니다. 저는 통증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조금의 통증도 느끼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더 이상 못참겠다 싶을 때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듭니다. 그러면 옆에 계신 선생님이 말씀합니다. “네. 다 끝났어요.”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불편하면 손들라고 해서 손들었더니 다 끝났다고 합니다. 통증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서 손을 들었더니 다 끝났다는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끝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요. 끝나면 이 통증을 당분간 느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마치 예수님의 재림은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재림의 소망은 고통을 감내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삶은 눈앞에 있는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식의 기도 응답이 성경적인 기도 응답이라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심판의 상징들이 때에 따라 나타나서 악한 사람들을 불사르고, 심판하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어떤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만이 응답의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만, 분명히 기도하면서 믿음을 지켰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어떠했습니까?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 줄게. 버텨. 이게 아니라 너가 더 어떻게 해야 된다.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작은 능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굳게 잡으라는 명령까지 듣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버티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3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아멘.
이기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성전에 기둥이 됩니다. 여기서 전제는 이기는 자입니다. 이길 뻔했는데 아쉽게 진 사람. 믿음으로 승리할 뻔 했는데, 막판에 미끄러진 사람, 다른 누구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떠난 사람, 이런 사람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과정이 뒷받침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입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버텨내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입니다. 그렇게 승리한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명예롭고 영화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죠. 즉,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빌라델비아 지역에서 신앙적인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멸시당하고 사회적인 순교를 감당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존귀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한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결코 내쫓기는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출교 당해서 회당에도 출입하지 못하는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요한계시록 3장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결단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으로 믿음의 정결을 지켰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작은 능력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말씀대로 살아가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해달라는 요구로 가득 찬 신앙생활이 아닌, 스스로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생활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를 소원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거나,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지 않아서 못했다는 식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지 않으셔서 못했다는 식의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 늘어놓지 않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재림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떠나지 않도록 말씀을 굳게 붙들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을 묵상하시면서, 평생토록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시는 모든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께 받은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품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온갖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믿음을 바라보며, 다시금 결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신앙생활이 아닌, 우리에게 주신 능력, 그 능력이 비록 작고 하찮게 느껴질지라도, 내가 속히 올 것이라 말씀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모든 화평의 지체들이 마음 모아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질 주님의 역사들을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인생 가운데 낙심하는 일 없도록 붙잡아 주시고 주님의 말씀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