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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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호 10:9-15
제목 :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의 한정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시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를 하든 시간과 연결 지어서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때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이나 취업하는 일이나 결혼하는 일들이 있겠죠.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요도에 따라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은 무엇을 언제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연속선상에서 인생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데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이때의 선택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만족할 수도 있고, 속이 쓰린 인생의 교훈을 얻은 선택이었다고 반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는 부분이어서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만약 누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한다면, 단언컨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선택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앙을 고백한 사람의 삶은 불신자로 살았던 이전의 삶과 180도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호세아서 10장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타이밍, 그 선택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선택인지를 기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주위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필요한 말씀인지를 함께 살펴보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결단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기브아 시대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더니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대까지 동일하게 범죄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9절에서 말하는 기브아 시대란 사사시대의 기브아, 사사기 19장에 등장하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인 기브아를 의미합니다. 사사기 19장에 따르면 기브아 동네에 사는 불량배들이 레위 사람의 첩에게 몹쓸 행동을 하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넘겨달라고 요청하지만 베냐민 지파가 거부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동성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힘없는 여인에게 몹쓸 짓을 한 이 기브아의 성폭행 범죄자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노를 금치 못했지만, 호세아서 10장 9절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시대에 죄를 지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시 10장 9절 말씀 보세요. (화면)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우리말 성경에서는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라고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어 상으로는 지금까지 그대로 서 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의미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직역한 것이 좀 더 와닿죠. 지금까지 그대로 서 있다는 표현을 좀 더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시대 때부터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대까지 어떻다는 것입니까? 기브아 시대 때 극단적으로 악했던 모습 그대로,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사사시대로부터 수 백년이 흘렀어도 최악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죠.
또 기브온이라는 표현은 호세아서에 다른 말씀들에서도 등장하는데요. 다른 곳에서 기브아는 북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위엄을 상징하는 도시로 표현됩니다. 사울 시대에 기브아는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기브아에는 사울의 요새화 된 궁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요새화된 궁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다윗 시대 이후로 기브아가 중요한 군사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아가 이스라엘에서 긍정적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울왕 시대에 군사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야심을 펼치려고 했다는 점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암소로 표현합니다.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아멘.
북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에브라임이 길들인 암소로 비유됩니다. 여기서 길들인 암소라는 말은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길들여진 암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 암소는 어떤 암소입니까? 밭은 전혀 갈지 않고 곡식만 밟기를 원하는 암소입니다.
아니, 농사일을 시키려고 길들이고 먹이고 키워놨는데 정작 이 암소 녀석은 곡식만 밟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이 암소가 왜 곡식만 밟고 싶어했을까요? 길들여진 암소가 곡식만 밟고 싶어하는 이유는 곡식을 밟을 때 자기 마음대로 곡식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곡식 밟는 것이 소가하는 일 중에서 가장 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1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밭을 가장 먼저 갈아야만 하는데, 밭 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암소가 중노동을 거부해 버리고, 그냥 모든 것이 수확된 다음에 추수된 곡식들만 즐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 암소는 힘든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누리고만 싶어하는, 손도 대지 않고 코만 풀려는 심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 암소와도 같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암소와 마찬가지로 축복과 형통은 최대치로 누리고 싶어하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성도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1절 말씀은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도 높은 날선 비판인데, 중요한 것은 날로 먹는 것만 즐기는 북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지시고 인도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일하기 싫어하면서 손쉽게 노동의 열매만을 누리려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멍에를 씌워서 밭을 갈게 하실 것입니다. 11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화면)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일하기는 싫고 남이 추수한 곡식은 한도 끝도 없이 먹고 싶어하는 이스라엘이 결국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밭을 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밭을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호세아서 10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밭 가는 것을 싫어하고 곡식만 편하게 먹고 싶어하는 게으른 암소와도 같은 이스라엘이 어떤 노동을 하게 됩니까?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묵혀놓았던 땅을 기경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상식적인 영역에서 땀을 흘리며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실제 노동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악함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떤 소망이 남아있습니까?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려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신다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시대처럼 윤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굉장히 악하고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지내온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리실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으로의 초대를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않고 즉시 응답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초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언젠가는 본인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호세아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서 56장 6절과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아멘.
이사야 선지자 역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는 것을 보면, 불신자가 하나님을 만날 만한 적절한 타이밍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에 의하면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역 시작하기 전에 청년 때에 다니던 교회에서 노방전도하거나 관계전도할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시큰둥하게 거절하면, 생각보다 크게 상처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온갖 생각이 다 들었죠. 그때 주위에서 이렇게 위로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아직 때가 아닌가 봐. 하나님께서 저 사람이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떻게 역사해주시겠지. 너는 최선을 다했어. 할만큼 한거야. 잘했어. 이렇게 좋은 말로 위로해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말씀에 따르면, 말씀이 잘 먹힐 만한 그런 타이밍이 따로 있진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 없을 심각한 어려움이나 고비를 만나야만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호세아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메시지를 전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임하진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을 때, 계속해서 잘못하고 있을 때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가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차갑고 냉랭하고 신앙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세아서 10장 12절에 기록된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라고 번역된 내용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자면,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그때이다.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좀 더 의미가 강하게 다가오죠.
자, 그래서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그때이다 라는 말씀에 반응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화면)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가 비처럼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비처럼 내린다. 굉장히 시적인 느낌이죠. 요즘 우리나라에 내리는 비가 옛날처럼 그렇게 깨끗하지 않아서 그렇게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만, 예를들어, 우리교회 본당만한 면적에 비가 내린다고 할 때, 어디는 비가 오고 어디는 비가오지 않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까? 그렇지 않죠. 비가 내리면 다 비가 내리는 거지, 어디는 오고 어디는 오지 않고 그런 것 없습니다. 다시 12절 말씀을 보시면, (화면)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에게 임하는데, 어떻게 임합니까?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공의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며 묵은 땅을 기경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스스로 보여주실 것이라고,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 주실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통해서, 비처럼 내리는 공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상적인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길들여진 암소가 일하지 않고 곡식만 먹고 싶어하는데, 주인이 새로운 멍에를 씌우고 밭을 갈게 할 때, 순종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3절 말씀을 보시면 정반대의 최악의 경우가 나타납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호세아 선지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다고 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밭을 갈아서 악이라는 씨앗을 심고 불의를 거두며 거짓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어떤 상태라는 것입니까? 경작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좋지 않은 땅, 버려둔 땅과도 같아서 밭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하고 준비하지 않고서는 씨앗을 뿌릴 수 없는 상태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의 이치상 밭을 가는 이야기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이렇게 현실적인 비유에 맞게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밭을 갈아서 악이라는 씨앗을 심고 불의를 거두며 거짓의 열매를 먹고, 또 밭을 갈아서 악이라는 씨앗을 심고 불의를 거두며 거짓의 열매를 먹고, 또 밭을 갈아서 나쁜 것을 심고 거두고 먹고. 이런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그 땅은 결국 버려둔 땅만도 못한, 최악의 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망가진 땅을 회복시키려면 밭을 갈아엎고 가시와 잡초를 뿌리째 뽑아버려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좋은 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때 적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패턴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밭을 경작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성화의 삶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주인이 그냥 길들인 암소를 끝까지 일 시키지 않고 그냥 자유롭게 먹고 싶은 것 먹게 하고 가만 놔두길 바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은 땅을 경작하는 데에는 피 땀 흘리며 일하는 수고와 노력, 헌신과 인내가 따라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악으로 밭을 갈고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메시지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10장 13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복음으로의 초대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화면)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계획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악한 왕으로 유명한 아합왕의 경우에는 국력이 굉장히 강했고 당시 병거만 해도 2천대 이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군사력도 탄탄하고 국제 정세에서도 위축되지 않을만한 상황에 하나님을 굳이 의지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는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유한 집안 배경과 든든한 재력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도록,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인생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가지 않는다고, 하나님 믿지 않는다고 돈 못버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또 시간은 어떻습니까? 주말에 예배 드리지 않아도 돼서 시간이 남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영적인 분별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별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겠지. 어떻게든 책임져 주시겠지. 다른 능력 있는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접할 수 있겠지. 이렇게 편하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기브아 시대와 같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때보다 나아진 것 하나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똑같이 서 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만 누리기 원하고 헌신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묵은 땅을 기경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체험케 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묵은 땅을 기경하십시오. 지금이 곧 하나님을 만날 적기입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따가요. 나중에. 좀 여유가 생기면요. 이런 거부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이 바로 여호와를 찾을 때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귀한 일에 동참하시며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즐거워하는 이 세상에 수많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또 그들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초청하시는 일에 우리를 동참시켜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 전파에 힘쓰는 모든 우리 화평의 가족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시며, 복음이 우리의 능력으로 온전히 작용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이니,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아 하나님을 온전히 찾는 자들 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주의 자녀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홀로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악한 세상 가운데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마음 다해 기도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나아가오니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에 맞는 귀한 역사들이 일어날 줄로 굳게 믿으며 소망을 품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크신 은혜 부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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