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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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애 3:19-25
제목 : 아침마다 새로운 소망
얼마 전 인터넷에서 연령대에 따라 없는 것에 대해 재미있게 적은 글을 보았습니다. 들으시면서 공감이 되시면 시원하게 웃어주세요.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100대는 다 필요 없다.
이 글을 읽었을 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진지해졌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핍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글은 불특정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sns를 거의 하지 않는 저에게도 노출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내용을 다시 묵상 해보았습니다. 10대에는 철이 없다. 철이 없는게 당연하죠. 그래서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에 이르기까지 철없는 친구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철이 없긴 하지만 공부 잘했으면 좋겠고 신앙생활도 잘했으면 좋겠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으면 좋겠고 학교나 학원, 친구들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고. 그런데 철이 없어서 생각대로 잘 되진 않죠.
20대에는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죠. 뭘 해도 힘들 것 같아 보일 수 있으니까요. 30대에는 집이 없다. 30대에 본인의 근로소득으로 자가를 소유하는 것은 일반 직장인의 기준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40대에는 돈이 없다. 대출이든 뭐든 어떻게든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마련하고 나면 돈이 없죠. 그리고 50대가 되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정년퇴직은 직장에 따라 다 다르지만, 뭐 50대에서 60대 사이에 일이 없어지는 것은 일반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60대는 낙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여기부터 저는 공감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만큼 또 살아야 60대가 되기 때문에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추측컨대,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중 60대 이상이신 분들이 어느 정도 계신데, 교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하거나 잠깐 대화를 나눠보면 낙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또 70대가 되면 이가 없어지고 80대가 되면 배우자가 없어지고 90대가 되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이렇게 없는 것만 생각하다보면 평생 결핍에 시달리면서 전전긍긍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없이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다 떠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철이 없다가 답이 없다가 집이 없다가 돈이 없다가 일이 없다가 낙이 없다가 이가 없다가 배우자가 없다가 남은 시간도 없다가 다 필요 없어지는 인생. 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살아온 인생의 두 배 이상의 세월을 보내신 성도님들 앞에서 인생을 운운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만, 12월 마지막 주일 오후예배 시간에 우리는 허무하고 우울해 보이는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소망을 품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어떻게 소망을 품었는지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소망을 품도록 소망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통을 오히려 나의 소망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19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위에 기초한 나라, 유다의 멸망은 예레미야의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19절에서 쑥과 담즙은 고통이라는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기억해달라고 구합니다.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인생 가운데 수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종류와 정도는 다르겠죠.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다양한 고통을 당합니다. 오늘날 이런 고통들을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는 불안과 위협의 감정을 스트레스라고 말하는데요. 이러한 스트레스, 고통들을 건강하게 해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성도님들도 다양한 스트레스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들을 어떻게 견뎌내셨는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고통들을 하나님께 기억해달라고 구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돌보아주시고 그러한 상황들로부터 건져내 주시고 위로해주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기억해달라고 간구하는 겁니다.
이렇게 간구하면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으로부터 오는 고통들이 즉시 해소가 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20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무엇을 기억한다는 말입니까. 고초와 재난, 고통들을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억해달라고 구하지만 이 고통들을 생생히 기억하니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21절과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아멘.
내가 당하는 고통들을 마음에 담아두니까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이 들지만 오히려 이 고통들이 나에게 소망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러한 고백은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오늘 본문 말씀과 시편 42편 말씀 모두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에 끝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하심과 무한하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랑에 기초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만 놓고 보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유다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방 민족,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치욕스러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모두가 진멸당한 것은 아니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우리들 사이에 있는 감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업이 망했습니다. 혹은 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인해 해고를 당했습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게 생겼습니다. 평생을 의지하고 살아가야할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럼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숨이 붙어있다는 것, 내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사실 잘 납득이 되지 않지요. 감사라는 건 감사할만해야 감사하는 거고, 소망이라는 건 소망을 품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기대할만한 게 있어야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망의 근거는 우리에게 언제나 충분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 민족에게 국토를 짓밟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직접 하사하신 삶의 터전들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유다의 남은 자들이 진멸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진멸당하지 않았음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소망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냥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잘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기억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향한 선한 계획을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만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지금 내게 주어진 고통이 오히려 소망으로 변화하는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품는 소망은 항상 새로워야만 합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아멘.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소망은 매일 아침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연말이 됐으니 내년에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번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그 고통스러운 상황이 당장에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소망을 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행복해서 빨리 하루를 시작하고 싶고 충만한 의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날 그날 해야 하는 일들이 있거나 염려되는 일들이 있다면 소망을 품는다기보다 걱정이 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걱정이 많은 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할 때 겁이 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 전하는 것도 걱정돼서 어젯밤 잠을 설쳤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우리 고등부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주일 전날 밤 걱정이 돼서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날 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첫 인사로 무슨 말을 건내야 할까. 어떻게 웃는게 좋을까. 해맑게 웃는게 좋을까. 적당한 미소가 좋을까. 고등부 선생님들을 만나서 어떻게 시작하는게 좋을까. 2019년 일년 동안 고등부를 열심히 섬기시면서 혹시나 지치진 않으셨을까. 만약 지치셨다면 어떻게 위로해 드리는게 좋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게 저의 성격입니다. 결국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런 것도 뭔가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진 않죠.
하지만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지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에 기대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소망이 새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항상 소망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비관적인 마음과 우울한 마음, 지친 마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울할 수도 있고 지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새로운 소망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25절까지 읽었는데요. 원래 이 내용들은 아래 46절까지 이어집니다. 너무 길어서 25절까지만 읽었습니다. 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아멘.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잠잠히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잠잠히 기다린다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면서 인내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볼 때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고난의 길로 인도하시는지, 왜 잘 안 풀리게 놔두시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겉으로 보기에 내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예레미야애가 3장 32절과 3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아멘.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근심을 허락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을 가지고 걱정투성이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지만, 그 고난의 길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어쩌면 우리는 2019년 한 해 동안 다양한 근심을 가지고 살았고 그 근심들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중에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 심령에 평안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해 오셨듯 내년에도 마찬가지로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예레미야 애가 3장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의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고통을 오히려 소망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만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상처, 고통들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품는 소망은 날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과 상황과는 상관없이,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며 날마다 새로운 소망을 품어야만 합니다.
연말이니까,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품는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품는 막연한 소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소망을 품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한 해 동안 여러모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2019년 52주차 오후 예배를 함께 드리며 우리가 어떤 근거로 소망을 품어야 하는지, 어떤 것을 구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는데요. 곧 다가올 2020년도에는 더욱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적인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근심 걱정들, 아픔들, 상처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시고 우리 심령에 풍성한 위로를 더해주셔서 2019년을 잘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유다의 멸망 가운데에서도 날마다 새로운 소망을 품은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며 소망을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평가절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굳건한 믿음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가올 나날들을 기대하며 나아가오니, 복되고 기쁜 시간들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