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와 불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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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약 3:6-12
제목 : 혀와 불의의 세계
탈무드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다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침묵의 중요성, 입을 무겁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하지 말라는 그런 얘기죠. 이와 비슷한 격언이 한 가지 더 있는데요. 재미있는 얘기니까 웃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 방송상으로는 성도님들 웃음소리가 잘 안들어갈 것 같아서 아쉬운데, 현장에서 밝게 미소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들어가기 앞서 탈무드에 있는 격언을 소개해드렸는데요. 탈무드뿐만 아니라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의 속담이나 사자성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즘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보다 더 젠틀하고 스윗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가식이나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진 않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가식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습관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도 있고 공동체 안에서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저 집사님이 우리 구역예배 드릴 때 안 오면 되게 허전하고 뭔가 분위기가 다운되더라. 뭔가 저 권사님이 계셔야 우리 구역 분위기가 좋아지더라. 이런 느낌을 들게 만드는 것은, 관계를 맺고 싶게 만드는 따뜻한 표정과 세심한 행동들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언어습관이 주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행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고보서에서는 독특하게도 예쁘게 말하고 예쁘게 행동하면 돼. 이렇게 말하지 않고 혀의 존재가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어떠한지, 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언어생활을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살펴보고 결단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은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행동을 하는게 좋을까. 어떤 표정을 짓는게 좋을까. 이런걸 고민하기보다, 공동체 내에서 재갈을 물리고 신중히 행동하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얼마나 오염되어 있습니까?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욕구와 충동뿐만 아니라 이성과 의지까지 죄에 철저히 오염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예수님에 따르면 악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뭐, 표현 자체는 흉내 낼 수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런 선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시편 10편 7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 죄악이 가득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말은 이미 죄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3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칭하여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여전히 죄성이 존재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과 성향과 습관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 맺는 데서 실수하고 신앙생활 하는 과정에서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약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3장 2절에 따르면 온전한 사람 또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야고보서 3장 말씀을 계속 읽다보면,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거룩함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습관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말로 범죄하지 않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보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렇다면 완전해질 수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믿음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이야 뭐. 때로는 좀 막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화도 좀 낼 수 있고 뒤에서 욕도 좀 할 수 있고. 이래야 인간미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내가 결단하지 못해서, 내가 실수해서 그런 것 뿐이지 내가 잘 못한다고 모두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9편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아멘.
시편기자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나의 행위를 조심해서 내 혀로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 사람이 내 앞에 있을 때 나 스스로 재갈을 입에 물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믿음이 좋아서, 경건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어떤 상황에도 무덤덤하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조심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슨 말이 나올까 걱정되어 재갈을 입에 물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말을 통제하기가 어려운지 깨닫게 됩니다.
이어서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욥기 2장 10절 말씀 하반절을 보십시오. (화면)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고난이 다 끝나고 나서 욥의 아내가 말하죠.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맞아. 하나님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는 이러시면 안되지 않아? 이러시면 나도 섭섭하지. 이러시면 나도 못 참지.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대해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욥이 일평생 말로 범죄했는지 안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됐든, 우리가 아무리 죄악된 존재라고 하더라도 말을 제어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혀를 스스로 잘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혀를 통제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야고보서 3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아멘.
혀를 통제하기 어려운 이유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혀는 불과도 같고 혀는 의롭지 않은 불의의 세계이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6절 말씀에 따르면 혀로 짓는 죄는 그 사람 전체에 영적인 오염을 퍼뜨립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바퀴를 불사릅니다. 인생의 바퀴란 삶의 흥망성쇠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혀가 지닌 맹렬한 파괴력이 인간의 전 생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파괴력은 지옥불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 지옥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라고 발음하는데요. 이 게헨나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등장하는 힌놈의 골짜기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교도의 어린 아이 희생제사가 행해진 곳이었고 여러 더러운 쓰레기를 태웠던 장소였습니다. 또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힌놈의 골짜기를 죽임의 골짜기로 부르시겠다고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쨌든 이 힌놈의 골짜기를 음역해서 번역한 단어가 게헨나이고, 그 게헨나가 우리말로 지옥인데요, 지옥에 있는 사탄의 힘이 혀에 파괴적인 악한 잠재력을 준다는 겁니다.
이런 악한 잠재력이 혀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야고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보다 더 중요한 논지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혀는 불이면서 동시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는 야고보에 의하면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3장 7절과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참 아이러니한 말씀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벌레, 바다의 생물을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왔는데, 자기 자신의 혀를 길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에 달려있는 걸 통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그 어떤 사람도 혀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인간 중에 혀를 완벽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님들 중에 혀를 길들인 것처럼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도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을 통해 우리의 말을 순화해서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하도록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혀는 궁극적으로 길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혀는 쉬지 않는 악이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쉬지 않는 악이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또 또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찬양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모순의 극치이죠.
하지만 야고보서 말씀을 읽지 않는 이상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존재여서 당위성을 계속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욕하는 것? 저주하는 것? 나쁜 줄은 압니다. 하지만 내가 나쁜 사람이라 내가 악한 사람이라 욕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나를 욕하게 만든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겁니다. 엄한 사람을 죄짓게 만들잖아요.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내가 욕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이런 식으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에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어떤 사람이 100퍼센트 잘못해서 온전히 욕을 다 얻어먹어도 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야고보에 의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욕하고 저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을 욕하면 부모를 욕하는 것과도 같고 부모를 욕하면 자식을 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누군가 부모에게 가서 당신 자식이 이런 잘못을 했는데 교육 좀 시키라고 말한다면, 기분 상하지 않을 부모님이 없고, 자녀들은 누가 부모님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에 주먹을 날리지 않을 자녀가 없습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돼라 저렇게 돼라 뭐 쫄딱 망해라 지옥가라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 받았기 때문에 저주해선 안된다는 이유 말고도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우리의 믿음은 말이 아닌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지표는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어떻게 증명됩니까? 교회에서 말을 얼마나 신앙적으로 잘하느냐로 증명될까요? 대표기도를 얼마나 은혜롭게 잘하느냐로 증명될까요? 말을 할 때마다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해야 증명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지표는 한 입에서 한 종류의 말이 나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찬송과 축복, 위로와 사랑의 언어들로 우리의 입을 정결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결과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죄에 오염되었고,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 지성과 행위 모든 것이 오염되었습니다. 특별히 야고보서에서는 혀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혀는 불과 같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의의 세계와도 같습니다. 세 치정도 되는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삶을 불태울 수 있는 악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혀는 쉽게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든 악한 말을 할 수 있고 상처주는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런 말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에게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회 밖에서는 나의 가족이나 지인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욕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우리 안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12절 말씀을 해석하시면서 열 네 가지를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신실하여 일구이언 하지 말 것.
둘. 성별된 것들을 속된 일처럼 경솔히 말하지 말 것.
셋. 간사하게 말하지 말 것.
넷. 악담하지 말 것.
다섯. 우직한 말을 주의할 것. 직언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지혜롭지 않게 함부로 말하면 불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직한 말을 주의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섯. 음해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일곱. 남의 일에 간섭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 할 것.
여덟. 다물은 입술을 주의할 것. 할 말을 안하는 입술도 악하다는 것입니다.
아홉. 자랑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열. 아첨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열하나. 능욕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열둘. 떠들지 않도록 주의할 것.
열셋. 비방하지 말 것. 당연하게 생각하시겠지만, 당연하지 않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비방하면서 “비방은 아니지만” 이라고 선포하는 자가 많으니 그것은 거짓말까지 겸한 비방이다. 뭔가 찔리는 그런 설명입니다.
마지막 열넷. 강단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고 딴소리를 하는 입술을 주의할 것.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이 열 네 가지의 사항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 네가지의 사항을 주의하는 것이 우리의 혀를 지키고 우리의 혀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님들 삶에 각자 느끼고 계실 말과 관련된 다양한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나무를 불태워버릴 수 있는 강력하고도 악한 힘을 가진 우리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필요한 때에 스스로 재갈을 물면서까지 침묵하는 방법을 익히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힘과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언어생활로 각각 속해있는 가정과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찬양할텐데요. 이 찬양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가사를 고백하시는 마음으로 악보를 보시면서 따라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언어생활을 지향해야 할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우리의 힘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때에 엄습해 오는 악한 죄성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도 쉽게 죄악에 굴복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입술로 끊임없이 범죄하면서도 죄를 짓는 줄 모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 혀는 불이며 불의의 세계라 하셨습니다. 또한 혀를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욱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할 줄 압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 부디 우리의 입술로 범죄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의 입술로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혀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