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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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2:6-16
제목 : 신령한 자
저는 어려서부터 저의 부친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교역자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스갯 소리로 목회자 세계에서 성골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같은 교단의 아버지가 담임목사다? 그럼 뭐 여러모로 도움받을 것이 많을 테니, 성골이라고 농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농담은 당사자의 입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 자녀 전체를 대변할 수 없습니다만, 저의 10대 20대를 돌아볼 때, 목사 아들로서 신앙생활하는 과정이 항상 기쁘고 좋은 일만 가득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목사 아들로 신앙생활하면서 배운 것은 정말 많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이다 보니, 어떤 일을 섬길 때 잘하든 못하든, 은사가 있든 없든,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없는 상황이어서, 되는대로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팀도 하고,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청년부 임원도 하고, 이것 저것 그냥 다합니다. 이러다 보면, 교회 일에 관해서는 어떤 일이든 쉽게 적응하고, 또 재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짬밥으로 커버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가든 밥값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훈련받게 되는 점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목사 아들로 살아가는 데 장점만 있느냐.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이 뭔가 드라마틱하지 않았고 항상 평범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교회에서 쭉 자라다 보면, 신앙 생활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신앙생활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은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큰 단점입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다 보니, 본질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고, 신앙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표현들은 느낌적인 느낌에서 나오게 됩니다. 죄악되지만 않으면,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저의 경우에는 영적이라는 표현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으로 뜨겁다. 뭐 이런 표현들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우리가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신령한 자인데요. “신령한 자”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영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려면, 본문에 등장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한 개념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지혜에 대해서 살펴볼텐데요. 고린도전서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울서신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총 28번 등장하는데요. 28번 중에 17번이 고린도전서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17번 중에 16번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3장 사이에 모두 등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지혜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지혜의 개념은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out)
국어사전에서는 지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인 능력. 그런데 이런 의미는 세상에서만 사용하지 않죠.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섬길 때, 보통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지혜의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와 유사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지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예컨대, 창세기에서 요셉은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라는 평가를 들었고,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윗도 사무엘상에서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죠. 솔로몬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지혜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구약성경에 따르면 지혜라는 단어는 실생활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단순하게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지식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지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2장 6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지혜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in)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out)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을 지혜롭게 잘하는 것에 있어서 종류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구약성경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말 그대로 지혜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린도전서 2장 6절 말씀을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 일을 잘하는 것은 똑같지만, 개인적인 능력에서 나오는 지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차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용되는 지혜라는 단어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절을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out)
이 말씀을 직역해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in) “우리가 말하는 것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인데,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영원 전에 미리 정하셨다.” (out)
사도 바울은 지혜의 기능적인 부분보다 먼저 지혜의 근원과 목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지혜는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냥 비밀도 아니고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냥 무슨 베일에 꽁꽁 싸매여 있어서 아무도 모르는 지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왜 이렇게 복잡스럽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지혜를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걸 예정이라고 부르죠. 구원론에서 나올법한 이야기가 지혜에 관한 말씀에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라는 것이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도 굉장히 특별하지만, 지혜의 목적이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지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지혜를 영원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시간대에서 혼자 몰래 소유하시지 않고, 이것을 인간의 역사 안에 계시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혜를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지혜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8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미리 정하신 지혜는, 이 시대 통치자들이 아무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통치자들이 지혜를 알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 통치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 통치자들의 지혜와 영적인 지혜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단순하게 일머리가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머리가 좋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고, 부하 직원들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머리 좋은 것을 항상 좋게만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지혜는 영적인 지혜와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한 빌라도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머리가 탁월한 총독이었기 때문에,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한 겁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면 자신이 관할하는 유대 땅에서 엄청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캐치했고, 자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세상의 지혜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못박은 겁니다. 이렇게 영광의 주님을 못박는데 찬성하고 동조한 모든 사람은 사도 바울에 따르면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일을 잘한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정보들을 취합해서 최선의 방안을 고안해 내는 것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은 영광의 주님을 못박았느냐 못박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모든 위정자들과 기업인들이 영광의 주님을 구원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건강하고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참된 지혜를 가지고 성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두 번째 중요한 단어, 성령에 관한 말씀인데요. 고린도전서 2장 10절과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out)
여기서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령 하나님의 대표적인 사역은 (in)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out) 방금 읽은 고린도전서 2장 10절,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여기서 보이셨다는 말은 “계시하셨다”라고 바꿔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보여주다”라는 말과 “계시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긴 합니다만, 무게의 차이가 있습니다. 원어로 볼 때 이 단어는 덮다, 감추다, 숨기다. 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러한 뉘앙스를 고려해보면, 그냥 단순하게 보여주다. 이 정도의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의 무게가 굉장히 가볍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더 격에 맞는 표현으로 바꿔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그냥 성령님이니까 믿어. 성령님이면 다 돼. 이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의 불가해한 영역이 어떻게 가해한 지평으로 확장되는지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조명하시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에 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2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out) 성령의 내적 증거와 조명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필요합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우리는 어떤 상태입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죄악된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춰주셔서 무지한 심령을 깨우쳐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게 하시며,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단어, 신령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영적으로 구분할 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우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자는 신령한 자와 육에 속한 자,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는 육신에 속한 자라고 표현됩니다. 육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 완전 똑같은 단어로 보이실텐데요. 한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를 의미하는데요. 처음에 살펴본 지혜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밀 속에 감추신 지혜를 갖지 못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성령 하나님께서 그 심령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out)
이러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이유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일들이 멍청해 보이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거부하는 것인데요. 요즘 시대에 온라인 상에서 대놓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증오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어요. 왜요? 성령의 일들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궁금한 마음이 들 수 있겠지만, 알 수가 없으니, 그런 호기심은 금방 잦아들고, 다시금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것이죠.
또한 이 시대의 통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교회 나옵니다. 자신이 집사라고 장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표를 얻기 위함이죠. 이와같이 정치인들의 종교행사 참석률은 기가 막히게 선거철에만 높아집니다. 육에 속한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에서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생의 자랑 때문에 출석하는 것이죠. 대놓고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통치자들에 비해서 훨씬 더 영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신령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 모두 “신령한 자”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만, 원어로 보면, 영적인 사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신령한 자 라는 표현과 영적인 사람 이라는 표현에는 확연하게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령한 자 라는 표현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바꿔서 읽으면 접근성이 좀 더 용이해 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과거에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어서 이질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별히 영성 훈련이라고 해서 밤새도록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저의 동기들, 선후배들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여러 종류의 을랄랄라를 하면서 엄청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문화충격이랄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동기들 중에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손가락에 꼽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동기들 사이에서 방언못하면 뭐, 아직 사람이 좀 덜 되었거나, 네. 농담 반 진담 반이고요.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런 인식이 전반적으로 있었던 터라, 그때부터 저는 영적인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며, 또 영적이라는 표현은 어떤 상황에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큰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요. 본문에 따르면 영적인 사람은 두 가지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째로 영적인 사람은 고린도전서 2장 6절 말씀에 등장하는 온전한 자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은 자력으로 온전해진 사람, 완전해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장 먼저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 가운데 거하셔야만 합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알려주셔야만 합니다. 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자는 영적인 성숙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적이냐 영적이지 않느냐의 기준은 신앙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느냐. 방언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런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영적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자, 두 번째로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문제도 참 많았지만 은사를 가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방언하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병 고치는 사람,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의 내용에서 영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겁니다. 어떤 은사를 행하느냐, 교회 행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 이런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만 영적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교회 모든 행사 및 성경 공부, 기도회 다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네. 물론 우리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냐 없냐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다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아무리 개인적인 열심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열심과 영적인 것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영적이다”라는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은사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성도가 자기는 아무런 은사가 없고 그냥 교회에서 소외된 지체들 챙기고 섬기고 사랑하고, 이것밖에 자기는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이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영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방언을 못해도, 예언을 못해도, 병을 고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품은 마음 그대로 인생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 신령한 자의 인생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혜와 성령과 영적인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의 단어를 연속해서 보면, 성령과 영적인 사람은 굉장히 긴밀해 보이지만, 지혜는 두 단어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해 보면, 지혜와 성령과 영적인 사람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영원 전에 택자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지혜를 얻으려면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계시해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이렇게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과정 가운데 성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는 사람은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이 영적인 성숙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성숙하다는 표현 대신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영적인 사람은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첫째로 온전한 사람이며 둘째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과연 나는 성경적으로 영적인 사람인가. 과연 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그리고 내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가운데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이 왜 이토록 교만하고 차가운 것인가. 이러한 부분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다 생략하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필요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복 저런 복 주셔야된다고 내내 기도만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부디 영적인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대로 살아가시며 하나님께 삶으로 영광올려드리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말로다 표현못할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영원 전에 감추어진 비밀과도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시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케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더 나아가 대한민국 모든 교회에 믿음의 본이 되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사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악된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다가 삼일 저녁에 은혜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해 침체되어 있던 우리 화평 지체들의 신앙생활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점차적으로 회복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화평의 지체들이 있다면, 그 마음을 붙잡아주시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찬양과 말씀과 기도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함께 누리기 원하오니, 흩어져 있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을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수요기도회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와 일상생활 가운데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기도 제목들이 하나님의 크신 뜻 안에서 응답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에 합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하오니,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우리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고, 이러한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며,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삶으로 주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제 육신에 속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out)
우리말 성경에서 육신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라는 번역은 정말 애매한 번역입니다. 일단 목사인 저도 육신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가 항상 헷갈립니다. 헬라어로 보면 프쉬키코스냐 사르키노스냐. 완전히 다른 두 단어로 구분해서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게 대체 무슨 차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 그래서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 화평교회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는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가라지도 존재하는 판국에 덜 성숙한 사람이라고 없겠습니까. 이러한 전제 하에 우리가 지혜롭게 신앙생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예컨대, 교회에서 서로 교제하다보면 상처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떻게 교회가 그래. 어떻게 집사님이 그래. 어떻게 권사님이 그래. 어떻게 그래.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습니다. 상처받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표현은 교회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도 있고 성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순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론 저는 목사로서 교회에 영적인 시험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만, 가뭄에 콩나듯이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가끔가다 시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말씀을 기억하면서 애꿎은 곳에 책임을 전가하거나 타인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두고 영적이라고 말할 때 영적이라는 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성은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채로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개념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을까요. 과연 우리는 영적이라는 표현을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대로 건강하고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영적이라는 말을 말씀보다 훨씬 더 넓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살펴본 말씀에서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미리 정해 놓으신 감추어진 비밀과 같은 지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증거와 조명하시는 역사를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나날이 성장하다보면, 영적인 사람, 다시 말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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