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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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겔 34:1-6
제목 :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4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주보에는 22절에서 31절로 되어있는데, 1절에서 6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하던 중에 변동이 있었습니다.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군주제도는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 어색하고 이상한 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왕은 있지만 진짜 왕은 아닌, 그런 군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은 일종의 대리 통치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백성들의 요구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세울 때에는 뿔에 기름을 담아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 그리스도 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라는 의미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마쉬아흐, 메시아라고 불리는 정통성을 가진 왕들이 실패하게 됩니다. 정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나라를 잘 살게 만들었느냐 못살게 만들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패한 원인 중 대표적인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을 아예 안 믿고 우상만 믿었던 것은 아니었죠. 하나님도 믿고 아세라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고. 이런 다신론적인 혼합주의가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의 씻을 수 없는 잘못은 남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우상숭배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양떼를 이끄는 목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목자들의 문제와 그들의 죄는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상숭배 다음으로 이스라엘 목자들이 저지른 죄악 첫째는, 자기 배만 불리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34장 2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 양 떼를 먹어야하지 않느냐? 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니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3절 보십시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자기 양떼는 먹이지 않지만 목자들이 필요하다면 살찐 양을 잡아먹습니다. 굉장히 이기적이죠. 정상적인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자가 먹으면 양도 먹는 거죠. 양이 먹으면 목자도 먹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가 먹지 못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먹는 타이밍이나 먹는 양은 다르겠지만,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 떼를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씀인 시편 23편은 1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이시면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고백과 에스겔 34장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심을 받은 왕들, 그리고 왕을 섬기는 고관들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리는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계속해서 살펴볼 문제들은 어떻게 보면 영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인 문제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먹이지 않았다. 주인이 가축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십계명을 위반한 문제입니까? 아니죠. 우상을 숭배한 문제와 관련되어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문제는 매우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이 알아서 양떼를 돌보지 않으니, 직접 사건에 개입하시기로 합니다.
에스겔 34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름 부음을 받은 그 목자들을 대적해서 하나님의 양 떼를 목자들로부터 되찾겠다고 말씀합니다. 무서운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양떼를 맡겼다고 해서 영원히 목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책망 받는 것이고 하나님께 빼앗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빼앗기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양을 먹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원래 양들의 주인인 하나님께서 양들의 소유권을 되찾아으신다면, 목자의 역할을 박탈당한 거짓 목자들은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저지른 죄악 둘째는, 양들에 대한 무책임한 방치입니다. 34장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아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들을 방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방치했습니까. 연약한 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고 혼자서는 강해질 수 없는 백성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또 병든 사람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병이 들면 치료가 필요한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이 든 사람을 그대로 방치한 겁니다. 또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않았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방치했다고 표현하는 것이지 참 안한 것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방치한 그 행위들은 16절에서 비슷한 어순으로 반복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아까 읽었던 에스겔 34장 4절 말씀과 굉장히 유사하죠. 뭔가 비슷한데 막상 읽어보면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에스겔 34장 성경을 펴고 계신 성도님들은 성경책을 직접 보시면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4절 보시면 너희가 무엇 무엇 하지 않았고 또 너희가 무엇 무엇 하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반대로 방금 읽은 16절을 보면 내가 무엇 무엇 할 것이고 또 내가 무엇 무엇 할 것이며 내가 무엇 무엇 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전개가 됩니다.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당연하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면 아흔 아홉 마리 잠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무조건 찾아야지. 찾으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런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리면 잃어버린대로 걔는 지 운명대로 살겠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아예 잃어버린 양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까요.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잃어버리든 말든 쫓기든 안 쫓기든, 집에 있든 없든, 밥을 먹었든 안 먹었든 아예 관심조차 없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면 돌아와서 잔치를 열 정도로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목자의 마음이죠.
잃어버린 양을 찾는 애틋한 사랑이 담긴 목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는 에스겔 34장 16절에서 한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주셔서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이 하지 않았던 일들을 직접 해주신다는데, 이 행위들을 하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 이런 사람들을 왜 케어해주시는 것일까요. 사랑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본문에 나와 있는대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의 때문입니다. 16절 끝부분 보시면,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라고 나와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정의”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미슈파트 라고 불리는 정의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공의를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정의가 살아 있다. 공의가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할 때에는 무언가 어떤 일에 있어서 정의가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행위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정의대로 먹인다 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런 표현에 따르면, 우리 인생에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범죄자를 현행범으로 잡아서 경찰에 넘기는 것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고, 상한 자를 싸매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삶에서 실현시키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내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저지른 죄악 셋째는, 양떼를 포악으로 다스린 것입니다. 목자들은 자기 배만 불리고 무관심으로 양떼를 내버려두고 끝나는게 아니라 포악함으로 양들을 다스렸습니다. 에스겔 34장 4절 제일 끝부분을 보십시오,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아멘.
포악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폭력과 잔혹함입니다.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양과 목자의 관계라면, 폭력적이고 잔혹한 목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양들을 사랑하고 아껴줘야 합니다. 양들이 아프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회복될 때까지 잘 돌봐줘야 합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 또는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이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아실겁니다. 물론 에스겔서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추측하려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생각해볼만 하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내가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 내가 낳은 아들 혹은 딸이 배고프거나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 기름 부음을 받아서 목자가 된 사람들은 양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관심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상숭배라든지 율법을 어겼다든지, 넓은 범위에서는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돌을 맞아 죽을 만큼의 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이러한 목자들의 행위를 중죄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워진 자들의 죄악들로 인해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에는 목자가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5절 보십시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양떼를 이끄는 목자가 없으니 양떼가 흩어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없으니 들짐승들로부터 목숨을 지킬 방법이 없어진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감당할 이스라엘의 양들은 온 땅에 흩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그 양들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혀 답이 보이지 않는,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하는 내용이 에스겔 34장 13절에서 15절에 잘 나타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에서 좋은 풀을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여기서 좋은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의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대는 포로기 시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좋아 보이는 상황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나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멸망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간 상황이기에 좋은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라고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왔지만, 1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양떼에게 좋은 풀을 먹이시고 이스라엘 높은 산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눕혀서 쉬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양의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에스겔 34장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세 가지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양은 먹이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린 죄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를 방치한 죄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 가운데 실현하지 않고 폭력과 잔혹함으로 양떼를 다스린 죄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엄청난 대규모 집단의 리더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는 어디에서나 리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있습니다. 직장이나 가정, 교회, 동호회나 친목회 등 어디서든 리더급의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34장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니까 왕만 해당되겠지.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정도만 해당되겠지 라고 간단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선 안 됩니다. 어디에서든 우리 역시 목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니, 혹은 이미 감당하고 있으니, 이스라엘 목자들이 저지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내 배만 불리는 사람이 되지 않고 밑에 사람을 방치하고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람이다 생각하고 가족처럼 신경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나 권력에 취해서 아랫사람을 착취하거나 애매한 수준의 언어폭력으로 괴롭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성도님들, 부디 이스라엘 목자들이 저지른 악한 죄들을 반복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거룩한 주의 자녀가 되시길,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며 살아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받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라엘의 거짓된 목자들과 같이 살고 있진 않습니까. 혹은 고치려 하는데 잘 고쳐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까. 받은 말씀 가운데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 아뢰고 함께 결단하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목자들의 죄악에 대해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남의 일로 치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알맞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합니다. 각자 소속된 공동체와 집단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여러 기도제목들을 놓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받은 줄로 믿고 나아갑니다. 당장 이루어지는 기도제목에는 감사를, 응답이 미루어지는 기도제목에는 인내와 기대와 소망을 품으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을 주장해주시고 항상 동행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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