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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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 6:7-10
제목 :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출이반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온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계속되는 전쟁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전쟁 중에 지휘관을 구하지 않고 방관하자,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추나라 왕이 맹자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방관한 백성들을 처벌하면 군대가 없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라고 물어보자 맹자가 답합니다. 나라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차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으니, 백성들이 지휘관을 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서 출이반이. 너에게로부터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속담이 있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일은 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죠. 콩을 심었으니 당연히 콩이 나지 않겠습니까? 콩 심은 데 팥이 날 수는 없는 법이죠.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자연법칙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깨닫게 되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이치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죠. 느헤미야 9장 6절 말씀 보십시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심판 날이 오기 전까지 가만히 계십니까? 그냥 영원히 안식하고 계시는 분이십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다 보존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속해서 만물을 보존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또 히브리서 1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데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따르면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이러한 원리는 무슨 태엽인형의 태엽을 돌린 뒤에 가만 놔두면 본인이 알아서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보존하시는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서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자연법칙에만 하나님의 보존 원리를 적용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심는 것과 거두는 것에 대한 자연법칙을 넘어서 훨씬 더 심오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말씀은 사실 다른 곳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에도 어디서 많이 본 얘긴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출이반이라는 사자성어도 있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속담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말씀이죠.
학자들에 따르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문구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최초로 이 말씀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어떤 문헌을 보고 인용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널리 알려져 있던 농경 관련 격언이 사용된 것이죠.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러한 격언을 먼저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온우주만물을 창세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누가 먼저 깨달아서 그 말을 먼저 사용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어디에서 이 격언을 인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먼저 사용했고 사도 바울이 그 말을 인용해서 6장 7절 말씀을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6장 7절의 상반절 내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6장 7절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을 뿌리든지 그것을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조롱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조롱하다”라는 말은 코웃음치다, 경멸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멸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코웃음치지 않도록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보존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고 이러한 원리를 거스르려는 마음은 마치 하나님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뿌린 것에 대한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를 거두려는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콩을 심었는데 팥을 거두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하는 것만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빗대어 비아냥거려야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결과물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특히나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지 않았으니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풍성한 열매를 얻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떼쓰고 고집부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오류를 정정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기도하기만 하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제목대로 응답해 주실까요? 울고 불고 밤낮 가리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열정을 높이 사서 매번 그렇게 응답해 주실까요?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이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삼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죠. 그 결과 힘을 잃고 블레셋의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름받은 사사가 두 눈을 뽑히고 맷돌을 돌리며 재주를 부리는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삼손이 하나님께 간구하죠.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힘을 주셔서 두 기둥을 뽑아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고 맙니다.
이 경우는 심는 대로 거두는 원칙의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욥기를 보면 의인 욥이 겪는 고난을 통해 예외적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의로운 욥은 본인이 심은 것과 정반대의 결과, 고난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갑절의 축복을 받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이라는 과정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칙의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 성경에 등장하는 손에 꼽히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하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심는대로 거둔다는 물리적인 법칙에서 보다 더 깊은 영적인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에서 두 가지 영적인 적용점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영적인 적용점은, 우리의 인생은 성령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아멘.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과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은 성령을 위해 심을 수 없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육체를 위해 심을 수 없습니다. 육체 반, 성령 반. 이런 식으로 반반 나눠서 심을 수도 없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육체를 위해서 심어야 할지, 아니면 성령을 위해서 심어야 할지. 신중하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만약 지금까지 육체를 위해 씨앗을 뿌렸다면, 8절 말씀을 진지하게 상고하면서 마음을 돌이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의 육체적인 유익과 만족만을 위해서 씨앗을 뿌리다간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두겠구나. 그렇게 되면 씨앗을 뿌린 수고와 헌신이 아무 소용이 없겠구나. 그렇다면 확실하게 열매 맺을 수 있는 일에 투자해야겠구나. 그런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 성령을 위해 씨를 뿌려야겠구나. 성령의 열매를 거둬야겠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잡아야만 합니다.
만약 성령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삶으로 인생의 방향성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갈라디아서 6장 8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잠언 22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악을 뿌리는 자는 무엇을 거둡니까? 재앙을 거둡니다. 악을 뿌렸는데 영적인 선한 것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한 것을 심는 인생은 어떤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3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은 화평으로 심어서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화평으로 심는다 라는 말이, 무슨 화평 농사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죠. 무슨 화평이라는 씨앗을 어디서 사와서 심어서 기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죠.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소리이지만, 이를 영적으로 받아들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동체 지체들로 하여금 서로 화평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씨를 뿌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보면 너무나도 좋아 보이죠. 화평, 평안, 사랑.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입니까. 하지만 이 단어들을 그냥 입에 올린다고 해서 알아서 그 단어가 가진 의미들이 구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공동체에 가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내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분쟁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분냄과 편 가르기. 이런 모든 악한 행위들을 근절시키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이러한 행위들이 바로 성령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령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인생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칙에서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영적인 적용점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화면 보시고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가 지치지 않으면 알맞은 때에 거둘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저와 같은 성질 급한 사람들을 정말 정말 힘들게 하는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씨앗을 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씨앗을 뿌리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냥 씨앗만 뿌려도 행복해. 열매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열매 하나 거두지 못해도 괜찮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매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 마음 속에 두 가지 갈등이 생깁니다. 먼저 첫 번째 갈등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 일들을 하다보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게 되죠.
그 가운데 항상 기쁨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럴 때마다 신앙적인 어려움,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되죠. 이때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서로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이런 노력을 하게 될텐데,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럴 때 찾아오는 마음은 실망감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괜히 마음 쓰지 않았을 텐데. 다음부터 이런 상황이 오면 노력하지 말고 그냥 내 마음만 잘 지켜야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이라는 큰 틀 안에서 생각할 때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선행뿐만 아니라 성령을 위해 뿌리는 영적인 일들, 이 모든 행위 가운데 낙심하는 마음, 실망하는 마음, 포기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도통 잘 맺히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에, 어차피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다. 라는 식의 비관적인 전망과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 식대로 행동하자면, 그냥 바보같이 선을 행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속고 속고 또 속는 것입니다. 이번엔 열매가 잘 맺히겠지. 라는 심정으로 초심을 간직한 채로 성령을 위한 영적인 씨앗을 계속해서 뿌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9절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두 번째 갈등은 씨앗을 뿌린 뒤에 거두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죠. 우리가 물리적으로 씨앗을 뿌리면 언제쯤 열매를 맺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씨앗을 뿌리는 때와 추수하는 때가 정해져 있죠. 며칠 정도의 오차가 있더라도 몇 달, 몇 년. 이런 식으로 들쑥날쑥하게 차이가 많이 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씨앗을 뿌리면 언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까요? 9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래서 열매를 언제 거둔다는 겁니까?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알맞은 때에 거두게 될 것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열매를 언제 거둔다는 겁니까? 알맞은 때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 따르면 그때는 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도 바울은 우리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열매 맺는 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알맞은 때, 적절한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9절을 다시 차분하게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힘주어 말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힘주어 말하는 부분,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네. 제가 너무 쉬운 걸 여쭤봤나요. 단숨에 맞추시네요. 네. 사도 바울이 힘주어 말하는 내용은 씨앗을 뿌릴 때 실망하지 말고, 지치지 않으면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관점과 사도 바울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열매는 열매를 맺을만한 마땅한 과정이 진행 되었을 경우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결과물입니다. 여기서 마땅한 과정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실망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과정보단 결과물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애쓰고 노력하고 헌신하는 과정은 원하지 않고 그저 달콤하고 풍성한 열매만을 원합니다. 적은 노력을 들여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기 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열매나 결과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어떤 열매, 얼마나 많은 열매, 얼마나 값진 열매.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실망하지 않고 지치지 않기를 권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씨앗을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과정에 포함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는 것이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영적인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두 가지의 적용점을 나누었는데요. 첫 번째 적용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성령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과 만족, 부귀와 안녕만을 위해 육적인 씨앗을 뿌리지 말고, 오직 성령을 위해 부단히 씨뿌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적용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는 행위와 거두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실망스러운 마음과 지치는 마음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언제 거두느냐. 어떻게 거두느냐. 얼마나 거두느냐. 수확에 관해서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수확하기까지, 적절하고 알맞은 때가 오기까지 실망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어떤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까.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는 이 성경적인 원리 원칙을 기억하신다면, 오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어떤 씨앗인지 돌아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겠습니다.
부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닌, 영생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위해 영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심으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통해 영적으로 씨앗을 뿌리는 우리의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비추어 육체를 위해 씨앗을 뿌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신앙생활인지 아닌지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해 우리가 말씀으로 결단하여 다시금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성령을 위한 씨앗을 나날이 뿌리고, 적절한 때에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함으로써 주님의 역사하심을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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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6:7)
사람이 무엇을 뿌리든지 그것을 거둘 것이다.
뿌림과 거둠의 내용을 일반화 시킴.
뿌림과 거둠의 내용의 일치는 모든 일에 해당됨
영적인 일에서 뿌림과 거둠의 내용적인 일치를 믿는 사람은 육적인 일에서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야 하며, 육적인 일에서 뿌림과 거둠의 내용적인 일치를 확신하는 사람은 영적인 일에서도 그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2. 목적(6:8) - 어떤 목적으로 뿌리며 거둘 것인가?
사도 바울은 “육체를 위하여 뿌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뿌리는 자”가 있다고 말함. 육체를 위하여 뿌리는 사람은 성령을 위하여 뿌릴 수 없고, 성령을 위하여 뿌리는 자는 육체를 위하여 뿌릴 수 없음.
육체가 목적이 된 뿌림과 성령을 목적으로 하는 뿌림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음. 육체를 목적으로 하는 뿌림의 결과는 육체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는 것임. 육체의 뿌림은 육체로부터 보답이 나오는 것인데, 썩은 것 외에는 거둘 것이 없음. 썩은 것은 죽음을 가리킴. 그러나 성령을 목적으로 하는 뿌림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결과를 얻게 됨. 성령의 뿌림에 대해 보답해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자신이심. 성령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임.
3. 심정(6:9) - 어떤 심정으로 뿌리며 거둘 것인가?
“우리는 선한 것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가 쇠진하지 않으면 알맞은 때에 거둘 것이다.”
선행할 때 명심할 것은 어떤 심정으로 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하고 이어서 “쇠진하지 않으면”라고 말한다. 낙심과 쇠진은 뿌림과 거둠의 최대의 적이다. 요원한 결실 때문에 뿌리다가 낙심하기 쉽고, 거두기 전에 쇠진하기 쉽다. 그러나 낙심과 쇠진을 이기면 결국은 “알맞은 때에” 거두게 될 것임. 모든 곡식과 열매는 제 때가 되어야 결실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됨. 그러므로 뿌리며 거두는 자는 소망과 인내를 가져야 한다.
4. 대상(6:10) - 뿌림과 거둠의 대상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를 얻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것을 행하자”
“좋은 것”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짐. 그런데 좋은 것을 뿌려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임. 세상에는 좋은 것을 뿌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할 사람이 없음. 그래서 사람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뿌려야 함.
그런데 사도 바울은 좋은 것을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행해야 한다고 권면함.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것을 행하지 못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행하는 것은 위선이기 때문.
조병수, 갈라디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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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바울은 계속해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함. 하나님께 본인이 져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져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노력함.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교만과 불화의 문제는 모두를 파괴시킬 수 있음. 이 문제는 성령의 열매만이 해결할 수 있고 극복시킬 수 있음.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은 성령으로 씨를 뿌려야만 함.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전통적인 금언으로 보임(인용 자료)
그리스 로마 문헌에 흔하게 등장했고, 바울 서신이나 복음서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는 유명한 농경 관련 격언임.
사도 바울이 이 금언을 사용한 목적은 다음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임.
1) 파종과 수확은 서로 직접적인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사에 정해 놓으신 바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을 거스르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생각하도록 속여질 수 있는 신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생이 축복과 심판, 어느 쪽으로 귀결되느냐에 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
3) 결론 : 공정한 인과 관계를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속여서 심판 대신에 축복을 주시게 하려는 인간의 시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조롱받지 않으신다.
실제적인 결론 : 선을 행함에 있어서 지치지 말자!왜냐하면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가 적절한 때에 수확을 거두리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회심자들을 염려했다. 무엇을 염려했는가? 훌륭하게 출발한(3:2-5, 5:7) 회심자들이 “성령과 보조를 맞춰” 사는 삶에 대한 열심을 상실하여(5:25) 방종주의적인 태도들이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염려했음.
또한 갈라디아 회심자들은 이기적이며 자기 만족적인 종교적 태도로 회귀하기 시작하고 있었음.
사도 바울이 언급한 수확을 거두는 시기는 “적당한 순간” “정해진 계절” 또는 “적절한 때”라는 관용어구임.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 어떤 계절, 어떤 때인지 명시되지 않음.
바울은 실제로 거두는 시기에 관심이 없음.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의 확실성과 어떤 적절한 영적 과정에 이르렀을 때 발생할 일의 불가피성에 집중됨. - 썩은 것을 거둘 것인가? 영생을 거둘 것인가?
사도 바울의 영적인 추수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신자의 행위들을 통해 발생함. 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에 반응하는 데 있어서 신자의 인내와 오래참음의 미덕을 동반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