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4 views
Notes
Transcript
본문 : 왕상 22:5-18
제목 : 듣고 싶은 말
답정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답정너란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답정너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답을 강요하기 때문에 보통 질문으로 시작되는데요. 인터넷에 찾아보면 네티즌들이 분류하는 답정너의 부류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상황으로 설명 드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먼저 첫 번째 상황으로 한 커플이 대화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대화 중에 여자 친구가 “나 살쪘지?”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1번.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날씬한데. 2번. 응. 객관적으로 좀 살찐 것 같아. 요즘 너 되게 잘 먹잖아. 몇 번이 정답일까요? 혹시 2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솔직하게 말해야 하니까 2번을 선택하실 수 있겠지만,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날씬한데. 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출제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정답을 말해야 하니까요.
두 번째, 신혼부부가 집에서 식사할 때 아내가 차려준 밥을 남편이 먹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맛있어? 이 상황에서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요. 1번, 짜. 2번 음. 맛있어. 최고야! 몇 번이 정답일까요. 객관적으로 요리 솜씨가 좋다면 당연히 기분 좋게 맛있다고 할 수 있을텐데 요리 경험이 적은 경우에는 솜씨가 조금은 서툴 수 있겠죠. 맛있냐고 물어보는 아내 입장에서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지만, 이 상황 역시 어느 정도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고생해서 차려준 음식을 혹평할 것까진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으면 그 어떤 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는 경우가 생기는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성경을 보면 답정너라고 볼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과연 하나님께 답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경우는 없는지 말씀을 통해 함께 돌아보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열왕기상 22장은 답정너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22장 2절과 3절 말씀 보세요.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남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 왕이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인 아합왕과 손을 잡고 아람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요. 이 전쟁은 길르앗 라못이라는 지역을 둘러싼 영토 분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합왕의 말에 따르면, 길르앗 라못은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아합왕이 신앙적으로는 분명히 악한 왕이지만, 길르앗 라못이 자기들의 땅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요단강 동쪽에 기업을 받은 갓 지파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합왕과 여호사밧은 서로 힘을 합쳐서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22장 4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동맹을 맺자는 아합의 요청을 여호사밧이 흔쾌히 받아들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습니다. 라고 말한 여호사밧의 발언이 문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아합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열왕기상 16장 30절에서 33절에 따르면 아합은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평가를 받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게 만든 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서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악한 왕이 아합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가 믿음 없는 사람과 같습니까? 그렇지 않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같은 정체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바르게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믿음 없는 사람을 보면서 사후에 지옥 갈 거라고 조소하고 비아냥거리고 통쾌하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반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정체성을 동일시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물론 여호사밧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이렇게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사밧의 아들과 아합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두 집안이 사돈 관계를 맺은 것부터가 잘못이며 사돈 관계를 맺은 이후에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다 왕인 여호사밧이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하지만 여호사밧 왕에게는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했습니다. 비록 그가 우상 숭배하는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고 우상숭배자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남유다에서 경건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왕기상 22장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믿음직스럽고 힘이 강한 동맹국과 힘을 합쳐서 전략적으로 전쟁에 임하면 승리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사밧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아니 전쟁할지 말지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입니까. 적국과의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승산이 얼마나 되는지, 전략적으로 어떻게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 뭐 이런 디테일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쟁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호사밧은 가장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먼저 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여호사밧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은 열왕기상 22장 5절에서 “또”라는 단어를 넣어놓았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에 따르면 그리고, 그러나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단어에 그리고, 그러나 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해석할 때마다 굉장히 애매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성경 번역본들을 참고해 보니 대표적인 성경들인 NIV성경과 cev 성경에서는 그러나라고 번역했고 ASV와 ESV 성경은 그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한글 성경 중에서 바른 성경은 “그러나 먼저”라고 번역했습니다. 굉장히 다양하죠.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접속사로 번역되느냐에 따라서 문맥의 뉘앙스가 달라지고 또 디테일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생길 수 있는지 두 가지 경우를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5절 말씀을 읽을 경우에는 문맥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맹 맺고 전쟁하는데, 겸사겸사 하나님의 뜻이 어떠신지도 한번 여쭤보시죠. 자연스럽게 어떤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처럼 일종의 연결 동작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죠.
반대로 그러나 라는 접속사로 읽을 경우에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 동맹 맺고 아람과 전쟁하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신지 여쭤보고 시작하시죠. 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뭐 결과적으로 볼 때 동맹 맺고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고 전쟁하고. 좌우지간 똑같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바꿔서 읽어보면 여호사밧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전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여쭙자는 여호사밧의 요청에 따라 아합은 선지자를 무려 400명이나 데려옵니다. 열왕기상 22장 6절 말씀 보세요.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이 말씀에서 아합왕과 400명의 선지자가 신앙적인 답정너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물어보는 사람은 이미 답을 정해놓았고, 대답하는 사람은 물어보는 사람이 두려워서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합왕은 처음부터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길르앗 라못은 원래 우리 땅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좋은 말로 돌려 받을 수 없다면 전쟁해서 돌려 받겠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죠. 처음부터 땅을 돌려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확실하고도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여쭙는다?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여쭤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냥 선지자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서 전쟁을 정당화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400명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아합왕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400명의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아합왕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다는 점에서, 우상숭배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만 봐서는 엘리야 선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정확하게 판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자칭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말합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뜻을 여쭙고, 또 하나님께서 승리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만, 이 상황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합이 이미 답을 정해놓았고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 하니,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떠한지 중요하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왜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뜻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미 정해놓고 구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품고 계신지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여호사밧 왕은 달랐습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승리를 장담하자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400명의 선지자들 말고 또 다른 선지자가 없는지 묻습니다. 7절 말씀 보세요.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더라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하니”
아합왕이 듣고 싶은 말을 속시원하게 해준 400명의 선지자와는 다르게 믿음의 소신과 사명을 굳건하게 지킨 미가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미가야 선지자에 관한 다른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7절 말씀만 보아도 미가야가 지금까지 어떤 사역을 감당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7절 중간 부분을 다시 보시면, 무엇이라 합니까? 미가야가 아합에게 좋은 것은 예언하지 않고, 나쁜 것만 예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한다는 말을 오해할 수 있는데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점쳐서 알려주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아합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예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저 저 미가야 저 고집불통 녀석. 북이스라엘의 왕인 나한테 어쩌려고 저렇게 한심하게 구냐. 어쩜 좋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저러냐. 이렇게 미워하기 전에 스스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 그래서,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이에 사마리아 성문 광장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요. 400명의 선지자 그룹의 리더라고 볼 수 있는 시드기야라는 인물이 철로 뿔들을 만들어서 상징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예언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철 뿔로 아람 사람을 진멸하실 것이라는 상징 행동을 통해서 반박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아합에게 미운 사람은 미가야 한 사람뿐입니다. 그 외의 400명의 선지자들은 평소에도 아합의 귀가 닳고 닳도록 듣고 싶은 말만 해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가야의 존재는 미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400명의 선지자는 아무리 스스로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선지자라고 우겨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위선적인 선지자들은 말씀과 관련해서 그 어떤 효력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 달달한 말, 기쁘고 기대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죠. 왜 그렇습니까? 예레미야 23장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하나님께 보내심 받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죠. 무슨 무당처럼 미래를 봤다는 둥, 어쩌고 저쩌고 이상한 말을 지어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2장에서는 시드기야를 포함한 400명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여쭙지도 않은채로 아합왕이 듣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이 이렇게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이 원하는 답을 주면서 행동하면 서로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참 보기 좋을 겁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서로 행복한 상황이 연출되니까요.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육성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고, 당장 무슨 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도 없고 수단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되는 겁니다. 401명 중에서 400명이 승리한다고 예언하고 단 한 사람만 패배한다고 예언하면 어떤 예언이 옳다고 보겠습니까? 상식적으로 400명이 예언한 내용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열왕기상 22장의 문맥이 지금 그런 상황인 겁니다.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벌써 승리를 쟁취한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미가야 선지자를 데리러 간 사신이 미가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왕에게 좋게 예언했으니까 당신도 그들처럼 좋게 예언해주십시오. 그러자 미가야가 대답합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그것만 말할 것이다. 라는 이 미가야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어떤 인생인가. 미가야 선지자는 이러한 부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마리아 성문 어귀. 가장 넓은 광장에 북이스라엘 왕과 남유다 왕이 왕좌에 앉아있고 400명의 선지자가 모여서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승리를 예언할 때마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될 겁니다. 승리에 대한 예언을 듣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힘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소망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00명의 선지자가 모여서 한목소리로 승리를 예언하는데, 당연히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상황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상황이 아니라 아합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상황입니다. 답을 정해 놓고 예언을 시킨 사람과 듣고 싶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해주는 거짓된 선지자들이 만들어낸 상황입니다. 17절 말씀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목자가 없는 양처럼 산에 흩어졌는데, 주인이 없어지고 나서 각자 평안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왕이 죽을 것이고, 왕이 죽고 나서 백성들은 평안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이겠죠.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듣고 힘차게 준비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400명의 선지자가 하나같이 승리를 예언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미가야 선지자가 단 한마디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듭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대로만 전하는 사명을 백퍼센트 완벽하게 감당했습니다. 그 사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400명의 선지자와 수많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는 수치를 당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대로만 했을 뿐인데, 뺨맞고 투옥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해서 항상 상황이 좋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한 세 사람, 여호사밧과 아합과 미가야의 모습을 돌아보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먼저 여호사밧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합왕과 사돈 관계를 맺었고, 우상숭배하는 사람들과 믿는 자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여기는, 다소 영적으로 부족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여쭤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면 멈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아합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여쭤본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이 답을 정해 놓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계획이나 계산은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는 명분도 확실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계산도 서 있는 상태였습니다. 합리적인 사고가 믿음의 영역을 지배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아합왕은 본인이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의 입을 조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에서는 아합처럼 사는 것이 가장 속 편합니다. 선지자로부터 항상 좋은 말만 듣는다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좋은 말만 들어도 될까 말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말씀에 따르면 플라시보 효과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겁니다. 겉으로 볼 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한들, 아무리 돈 잘 벌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들, 영적으로 잘못된 인생을 살아간다면 승리한다는 말씀이나 축복받는다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본인에게 하나도 유효하지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벌 받기에 마땅한 인생을 살아간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물질적으로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합왕처럼 인생 가운데 우리만의 정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시도를 멈춰야만 합니다. 아무리 듣기 싫어도, 아무리 듣기 괴로워도 말씀으로 변화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다면,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즉시 멈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돌아보시면서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인가. 과연 나는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시도했던 적은 없는가. 이런 부분들을 진지하게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아합왕처럼 답정너가 담겨있는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담대하게 끊어내고, 온전히 주님 뜻에 맡겨드리는, 그러한 건강한 신앙생활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며 주님께 영광돌리는 인생을 살아내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위와 건강과 물질적인 행복이 앞서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가 주님께 어떤 것을 구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추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들을, 우리 생각에 제한시키는 그런 잘못된 오류를 멈추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든, 주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별하기 쉽지 않고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영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오늘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지고, 뜻밖의 질병과 사고로 인해 어려운 일들을 당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주님의 자녀들 기억하여 주시고 주님의 강한 팔로 붙잡아 주시며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건강한 믿음 허락해 주시며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우리 모든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주해
< 베이커 >
1.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401번째 선지자로 미가야가 불려옴. 미가야는 아합이 조항하는 설교자가 아니었음. 8절. “내게” 흉한 일만 예언하는 사람임. 18장에서는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에 맞서 싸움. 여기서는 미가야가 400명의 야웨 예언자와 맞서 싸움.
2. 미가야는 조롱하는 말투로? 혹은 진심으로 희망하는 마음으로? 다수의 견해에 동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후에 아합이 죽을 것을 예언함.
3. 아합의 죽음 – 눈에 띄는 왕의 복장을 벗고 일반 병사의 옷으로 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병사가 이스라엘 군인에게 부상을 입히려는 의도로 아합이 입은 갑옷의 가슴막이 이음새 부분을 겨냥해서 활을 쏨. 마치 다윗이 골리앗의 이마를 맞춘 것처럼.
< 여호와의 날개 아래... >
400명의 예언 집회
길르앗 라못에서 싸울지 말지 하나님께 뜻을 여쭈어보고 결정
아합왕 – 선지자 400명을 부름. 이들의 정체는 불분명함. 22:11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라는 사신 공식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본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볼 수 있음.
그러나 여호사밧의 요청대로 미가야를 부르게 됨. 미가야를 데려오는 사이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 모든 선지자가 모여서 예언을 함.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서 이것으로 아람 사람을 진멸할 것이라며 예언함. 상징적인 행위임. -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상징행동과 같음.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미가야에게 모든 선지자들이 왕에게 하나같이 길한 것을 말하니 당신도 그들처럼 길한 것을 말하라고 주문함.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을 말할 것이라 말하였음.
목자 없는 양 : 아합왕의 죽음을 예고함. 목자는 왕의 이미지이기 때문.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