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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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 23:3-10
제목 :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중복으로 지니고 있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화면) “쉽고 편안한 환경에선 강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며,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
또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화면) “고통은 깨달음을 준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후에 우리는 진리 하나를 얻는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슬픔이 찾아왔다면 기쁘게 맞이하고 마음속으로 공부할 준비를 갖추어라. 그러면 슬픔은 어느새 기쁨으로 바뀌고 고통은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이외에도 고난에 관한 명언들을 찾아보면, 고난이 주는 긍정적인 측면들에 대해 말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고, 인생의 문제들은 유익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대해 반대하실 분들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통과 역경이 다 지나간 후에 훌륭한 결과를 얻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인과관계가 분명히 밝혀지고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확실히 깨달았을 때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이지요.
하지만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고난의 종류는 각양각색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 내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받는 인생의 채찍, 욥과 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등 우리 인생에서 직면하게 되는 고난의 종류는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고난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고 내가 무엇 때문에 고난 받는지 그 이유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고난이 닥쳤을 때 고난을 대하는 건강한 성경적인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시면서 고난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마음가짐에 대해서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자녀를 모두 잃었고 양떼와 가축들마저 모두 잃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성 부스럼증이 생겼습니다.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잿더미 가운데 홀로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것 뿐이었습니다. 부유한 유목민이었던 욥의 외모는 흉측하게 망가졌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터리 중환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아내는 위로의 말이 아닌 하나님을 저주하고 목숨을 끊으라는 치욕스런 말을 건냅니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의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너무나도 답답한 욥의 마음을 더욱 더 무겁게 만듭니다. 욥의 친구들이 어떻게 욥을 괴롭게 만들었습니까? 욥이 당한 고난은 욥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욥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세 친구의 기계적인 인과응보 사상과 욥이 스스로 변호하는 내용이 욥기 전체의 내용을 이끌어갑니다.
모든 내용을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오늘 본문 말씀과 근접한 내용을 보면,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욥기 22장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화면)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4절 자막) 하나님께서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시는 이유가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욥이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욥을 책망하시고 심문하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5절에서 어떤 말을 합니까? (5절 자막)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욥이 너무나도 악하기 때문에, 욥의 죄악이 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개념 자체는 틀린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된 사람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징계받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아멘.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면, 자식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잘못을 교정해주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걸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라면 당연히 사랑하는 자녀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타이르거나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가정에서의 체벌은 비인격적인 것처럼 인식된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적당한 체벌을 권장합니다. 잠언 29장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아멘. 채찍과 꾸지람은 지혜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잘못하면 벌을 주거나 적절한 체벌로 잘못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는 다윗언약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아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을 통해 교정받게 됩니다. 언약을 맺은 당사자인 다윗의 경우에는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이가 죽게 되고 그 이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징계를 여러 차례 받았죠.
이처럼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은 성경적인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징계를 통해 교정받습니다. 인생의 채찍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욥기의 전체 맥락에 따르면 친구들의 견해는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교리적으로 심각하게 고착화 되어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노력이 없이 그저 관습적인 사고에 단단히 얽매여있습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인과응보 사상을 무분별하게 적용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마음대로 제한하고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차단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욥, 너가 당한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친구들의 비판은 잘못된 비판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의하면 (화면)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성경의 평가는 한 치의 오류도 없기 때문에, 욥은 욥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욥기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욥이 어떻게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막을 잘 압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시험을 제안하는 것으로 고난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알 방법이 없죠. 또 어떻게 보면, 친구들은 욥의 믿음과 그의 온전한 삶을 잘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시선에는 욥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답답한 상황에 처한 욥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23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아멘.
욥은 친구들의 인과응보사상에 근거한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면하고 싶어합니다. 4장부터 23장 이전까지의 내용을 보면 서로의 주장을 주거니 받거니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23장에서는 친구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독백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내용으로 말하는가 하면, 욥은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서 따지고 싶다거나 원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애절한 외침이자 몸부림입니다.
이러한 욥의 애절한 외침과 몸부림은 감정으로만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 23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여기서 호소하다 라는 단어와 변론하다 라는 단어에는 법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식적인 자리인 법정에 서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성적으로 아뢰고 자신의 온전함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죠.
만약 욥이 원하는대로 법정에서 하나님을 만나 변론하게 된다면, 과연 욥의 주장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욥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욥기 23장 7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아멘.
하나님과 변론할 수만 있다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고난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낙관적인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욥기 38장에서 42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욥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욥은 하나님과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토록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책망받을 뿐, 하고 싶었던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욥기 40장 2절 말씀 보십시오. (화면)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또 욥기 40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아멘.
욥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실제로 우리가 어떤 이유 모를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감히 하나님과 변론할 수 없고 감히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욥은 폭풍우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하고 변론하고 싶어합니다. 8절과 9절 말씀 보십시오. (화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아멘.
아마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고난 가운데 한번쯤 이런 시도를 해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체 어디에 계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대체 왜 이런 고난을 나에게 주시는걸까? 이런 의문에 가득찬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결과는 어떻습니까? 욥기 23장에서의 욥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가도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으시고 왼쪽으로 가도 만날 수 없고 오른쪽을 봐도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알 수 없는 고난의 정체에 대해, 그리고 나의 온전함에 대해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은데,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답답함. 이러한 답답함은 모든 신자가 겪는 고충 중에 하나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고난이 오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친다고 해서 고난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이렇게도 고난이 오고 저렇게도 고난이 오고 참 다양한 방식으로 고난을 겪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여쭤도 보고 싶고 따져도 보고 싶고 그런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참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직접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핸드폰 하나면 모든 걸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전화도 바로바로 되고 카톡도 바로바로 되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너무나 편한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의사소통에 있어서만큼은 쉽게 인내할 수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다?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굳어지면 결국 영적인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공백이 자신의 믿음을 떠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는 성경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욥은 어떻습니까. 사람 중에서는 영적으로 가장 완벽한 사람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으로부터 떠났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조차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고 또 찾아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합니다. 욥은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고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은 어떤 마음을 품습니까?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시작.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 극한의 고난과 고통을 순금으로 연단 받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과정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치 이 고백은 시편 23편 4절 말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화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고 하더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를 가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욥기 23장 10절 말씀은 이보다 더욱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이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으며, 이미 모든 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랑하는 자녀를 모두 잃었고 이미 모든 재산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욥의 마음은 무너져도 이미 무너졌어야 했습니다. 욥의 정신은 망가질대로 망가졌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하지만 욥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변론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했지만 하나님은 만나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으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길”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삶과 관련해서 개인이 살아온 길, 살아온 방식, 생활 양식 등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10절에 등장하는 길이란 단어 역시 욥의 인생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는 고백은 욥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길, 그리고 장차 앞으로 어떤 인생 여정을 걸어야 하는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성격과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면해서 속시원하게 변론하고 자신이 당한 고통을 경감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다 알고 계신다는 욥의 고백은 그의 온전한 믿음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는 말은, 내가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격차를 온전히 인정해야만 가슴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는가. 이런 식의 반문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속상함과 괴로움, 슬픔, 고통 등을 아뢸 수는 있으나 결과적으로 고난을 대하는 자세는 욥과 같아야만 합니다. 혹독한 고난이 나에게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고난을 주신 것이라고 인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처한 고난이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마치 순금을 만드는 제련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제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고난의 종류는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직장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관계로부터 국가로부터 참 다양한 종류의 고난이 우리 삶에 엄습해 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일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일 수 있고 욥과 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상황과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정 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 살펴본 욥기 23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고난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아야만 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분이 되고 나의 분노를 받아주시는 그런 분이 되어선 안 됩니다.
물론 고난당하는 이유조차 모르는 것이 우리 마음에 너무나 큰 답답함이 될 수 있고 해소되지 않는 고통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인생의 여정을 다 아시기에, 비록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불순물이 섞인 나의 삶을 제련하심과 동시에 의로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순간 순간마다 찾아오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시험을 맞이할 때마다 순금과 같이 제련될 우리의 앞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아멘.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지와도 같은 존재이며 주님 없이는 너무나도 무기력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격차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물으려 할 때가 있음을 회개합니다. 비록 다 알 수 없더라도 우리가 가는 인생의 여정을 친히 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순금과 같이 제련되는 고통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굳건히 붙잡아 주시며, 주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날마다 동행하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