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사랑,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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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3
제목 : 믿음, 사랑, 소망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지 함축적으로 요약한다면,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단어를 떠올릴 때 아주 자연스럽게 무게중심이 뒤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 보세요. (화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사랑 쪽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죠. 무엇 때문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 은사주의적인 신앙생활에 편향되어 있는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모르고 말씀을 보더라도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만 상대적으로 믿음과 소망은 덜 중요하고 사랑만 강조해서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유지하긴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과는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의 순서로 언급되지만 본문에서는 (화면) 믿음, 사랑, 소망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낌상으로는 믿음 소망 사랑이 맞는 것 같은데, 다시 봐도 믿음 사랑 소망 순으로 기록되어 있죠. 뭔가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기록 연대로 보자면 데살로니가전서가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원조는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언급된 배경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믿음, 사랑, 소망이 언급된 배경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1장 3절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기록되었는지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요.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부 도시 중의 하나로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2차 전도 여행 중에 방문했던 지역입니다. 이 도시는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유대인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빌립보를 떠난 바울은 잠시 데살로니가 도시에 3주 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무는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개종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과 그의 일행들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상보다 일찍 떠나게 되죠.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리는 내용은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5절 사이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화면)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 반대하고 핍박합니다. 이 유대인들, 유대주의 신봉자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만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쟁이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주의 신봉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이들에 의해서 급하게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되었고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인들도 박해 당해서 떠났는데, 그 유대주의 신봉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일원들을 박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성도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인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믿음이 충분히 뿌리 내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어떤 소식을 전해듣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7절과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아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책의 순서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전서가 고린도전서보다 뒤에 있지만 기록된 연대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전서가 먼저 기록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니까 성경이 기록된 순서로 보면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개념이 데살로니가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독특한 점은 믿음, 사랑, 소망이 고린도전서 13장처럼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무언가를 수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무언가를 수식하는 그런 명사구로 등장하는데요. 1장 3절 말씀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고 기록되어있죠.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명사구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믿음 사랑 소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 수고, 인내를 말하는 것인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명사구인 믿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화면) 믿음의 역사에서 이 역사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굉장히 거창하게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일, 노동, 행위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믿음의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그런데 믿음의 행위라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행위라니. 뭔가 믿음과 칭의를 강조하는 바울 서신과,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서로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행위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왜일까요. 믿음이란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듣고 믿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듣는 이에게 믿음을 주시죠. 그렇게 선물로 받은 그 믿음이 우리 내면에서 형성되고 자라납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그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단순히 지식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이 믿음이 정상적으로 자라난다면 선한 행위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성장해 가는 사람의 언행과 태도를 통해서 그 믿음이 외부에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행위 자체만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믿음은 결코 건강한 믿음, 성장해 가는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에 따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행함이라는 단어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의 믿음의 역사라고 할 때 역사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저만 소름 돋는 건 아니겠죠?
자 그래서 이렇게 보면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말하고 있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행위에 대해 칭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바울과 야고보 모두 믿음이 담겨있는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두 사도의 말씀에 따라서 성도의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반드시, 필연적으로 행함 또는 행위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역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 어떤 행위들을 언급하는 것인지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믿음이 담겨있는 선한 행위가 우리의 삶에서 빈번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명사구인 (화면) 사랑의 수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란 무엇입니까. 구원받을 자격 없는 죄인을 향한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이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해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아가페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수고라는 단어는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가 의미하는 수고란 피곤할 정도의 노동 또는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의미합니다. 회사 사무실에서 업무 볼 때의 노동이 아니라 육체 노동의 현장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그런 노동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수고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끊임없이 희생하며 수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랑의 수고란 무엇인가에 대해 요즘 들어 자연스럽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만으로 5개월 된 아들 이현이를 키우면서 사랑의 수고란 무엇인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의 수고란 본질적으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만, 그 수고로움이란 무엇인지, 아들을 키우면서 간접적으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들을 낳기 전에는 육아지옥이라는 말에 대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남의 자식도 아니고 본인이 낳은 자식인데 사랑하기만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순식간에 지나가지 않을까? 라는 그런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5개월 된 아들과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힘든건 힘든거구나. 월요일 하루만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데도 이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자기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는 일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쉽지 않겠죠.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사랑의 수고라는 명사구는 삶이 담겨있는 그런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랑의 수고란 그냥 눈감고 마음으로 느끼고 감정적으로 체험하는 그런 비활동적인 사랑이 아닌 육체노동이 수반되는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힘이 드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하려면 그 사랑에는 분명히 수고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사랑의 수고에 대해 이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수고로운 봉사를 기피하는 자는 진정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다. 수고는 사랑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입니까? 수고로운 봉사를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두 번째 명사구에 등장하는 이 수고라는 단어는 첫 번째 명사구에 등장한 역사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강하고 뉘앙스를 담고 있으며 훨씬 더 괴롭고 힘든 육체의 노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그냥 좀 수고했다. 그냥 좀 힘들었다. 이 정도가 아니라 정말 정말 힘이 드는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영적으로 시험 들까봐 관뒀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다른 분들을 사랑하는 과정 가운데 많이 많이 힘드시다면, 그것은 아주 아주 잘하고 계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시는데 육체적으로 고단하다? 지친다? 그건 아주 아주 잘하고 계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너무 고되고 고단하다는 느낌을 받으셨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랑을 행하고 계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사랑의 수고를 온전히 해내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명사구인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망의 인내는 세 가지 명사구 중에서 가장 긴데요. 이 명사구 전체를 읽으면 어떤 인내입니까? (화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이죠.
이 소망의 인내란,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인내에서 비롯되는 소망은 모든 일이 결국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는 그런 미미한 소원이나 자포자기식의 갈망함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예수님 나중에 언젠가 다시 오시면 모든 게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마음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구체적인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소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 당하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숨 쉬는 그 인생 가운데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을지라도,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소망을 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상황이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고대하며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를 간단하게 추상명사 정도로만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칭찬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대상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했습니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행동들을 하고, 성도 간의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어떠한 고난과 박해를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하여 소망을 품으며 인내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이 세 가지의 추상명사가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역할을 하는 단어로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역사가 짧고 사도들의 신앙 지도를 깊게 받지 못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누가 봐도 상업의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서, 수많은 인종이 교류하고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그런 도시에서 사도 바울의 칭찬을 받는 교회라니. 너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넫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개종했다는 사실이나 예배에 빠지지 않고 규칙적으로 시간을 구별해서 드린다는 점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칭찬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의 소망이었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믿음 사랑 소망이 아닌 그들의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 사랑 소망을 칭찬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나타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풍성하게 드러나고 있는지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일들을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서 끊임없이 해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과정 중에 녹초가 되는 그런 수고들을 온전히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이 때때로 우리의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우리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소망의 인내로 넉넉히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나도 위축되어 있지만, 오늘 받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낌없이 해낼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선한 행위로 나타나기를, 사랑의 수고가 모든 성도들에게서 나타나기를 원하오니, 주여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소망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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