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를 가져다가 구원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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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삼상 4:1-11
제목 : 언약궤를 가져다가 구원하게 하자
저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 못했습니다. 달리기도 느린 편이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 체육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그중에서 공을 다루는 종목들을 잘 못했는데요. 축구시합을 하면 항상 수비수를 맡았습니다. 남성분들은 아마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아실 겁니다. 축구 잘하는 친구들은 다 공격수, 미드필더 이런 포지션 맡고 축구 못하는 친구들은 수비수를 맡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머릿수 맞추려고 포함시켜 주는게 수비수였거든요. 물론 이건 학교에서의 얘깁니다.
어쨌든 반별 체육대회 이런 거 하면 저는 항상 수비수 역할을 맡았습니다. 좀 나도 공격하고 싶다. 골 좀 넣고 싶다. 이런 마음에 은근슬쩍 앞으로 나가면 수비하러 빨리 돌아가라고 책망받기 일쑤였죠. 그럼 다시 우울한 마음으로 수비하러 돌아가서 멍하니 지켜보곤 했습니다. 패스해서 골 넣고 다같이 미친 듯이 세레모니 하는 그런 일은 저에게 너무나도 먼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축구 경기할 때 어떻게 보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죠. 수비수니까 공좀 만질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체력 좋고 발빠른 미드필더 친구들이 어느새 내려와서 제가 차려고 하는 것도 금새 채갔거든요. 그럴 때마다 기분이 너무 상했지만 그래도 경기는 이기고 싶었습니다. 공에 손도 못대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발 이기게 해주세요. 공격하는 친구들이 제발 골 좀 넣게 해주세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면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정말 희한하게도 간절하게 기도할수록 경기에서 질 확률이 높더라구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모릅니다. 정말 간절하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셨다고 느껴지니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이루어주신다. 복주신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만 열심히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멋도 모르고 막 마음속으로 이기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발 골 넣게 해주세요.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바보같이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어릴 땐 기도만 하면 들어주신다. 이기게 해주신다. 내 뜻대로 다 해주신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생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어선 안 되겠죠.
오늘 본문 말씀은 제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일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하면서 법궤를 빼앗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부터 쭉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쟁을 하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이미 정해져있다니 이상하게 들리시죠? 이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한해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해봐야 아는 게 아닙니다. 긴지 짧은지 대봐야 아는게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전쟁이란 전략이나 군사력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수없이 많이 증명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산다면, 어떤 민족이 쳐들어와도, 어떤 강한 무기를 가져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승리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귀중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실로 성소의 부패입니다. 성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동침하며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둘째는, 성소가 부패함에 따라 연쇄적으로 이어진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입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극도로 달하면서 심판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법궤를 할례 받지 않은 민족 블레셋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법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 그룹의 날개 사이 공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법궤가 더러운 이방 민족에게 빼앗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법궤를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빼앗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고귀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내어주실 만큼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너무나도 심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표면적으로 볼 때 법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처럼 느껴집니다. 한번 혼나봐라. 한번 비참해져봐라. 한번 죽어봐라. 이런 심판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심판적인 성격과 동시에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궤를 빼앗긴 사건을 통해 어떤 교훈들이 담겨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1절과 2절에 보시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어떻게 싸웠는지, 몇 명대 몇 명으로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패배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4장 3절 상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아멘.
전쟁에서 패배하자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한 말은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의 반응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수아서 7장 7절 상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말만 놓고 보면 굉장히 비슷하죠. 거의 똑같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에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서 7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난 뒤에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날이 저물도록 그렇게 애통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패배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하나님 말씀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애통해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수아가 보였던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찢고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리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그렇게 몇 시간동안 애통해하며 묵상하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겐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할 틈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여쭤볼 틈도 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릴 틈도 없이 즉시 행동에 옮깁니다. 사무엘상 4장 3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시작.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 이렇게 탄식한 뒤에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해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해법은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하지만 근거 없는 해법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법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일하심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법궤는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여리고성을 어떻게 정복했습니까? 언약궤가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어떤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약궤가 돌았고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또 그 이전에 모세는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민수기 10장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모세의 기도에 의하면 광야를 방랑하던 때에 법궤는 전쟁의 도구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법궤는 무기가 아닙니다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앞장서시니 당연히 법궤가 떠나면 하나님의 대적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잘못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던 것이며 그 결과 미신적인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어떤 반응으로 나타납니까?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이 아닌 법궤를 가져오라는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의 믿음과는 달리 법궤의 존재 자체는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한 상황에서 법궤가 있다고 해서, 그 법궤라는 물건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했던 말을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3절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여호와의 언약궤를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구원하게 하자. 이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믿음입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이름만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마치 오랜 역사와 뿌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물 떠놓고 기도하고 달님 바라보며 밤새 기도하고 나무 앞에서 기도하는 그런 샤머니즘과 무엇이 다릅니까? 법궤를 가져오면 법궤가 우리를 구원할거야 이런 미신적인 신앙과, 물 떠놓고 맹목적으로 억지 부리듯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름만 다를 뿐 성격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4장 1절에서 11절까지의 내용 가운데 언약궤는 계속해서 여호와의 언약궤로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의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블레셋과의 1차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약궤를 가져와서 구원하게 하자! 이렇게 말한 뒤 언약궤를 가져와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 대패합니다. 언약궤도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3만명이 죽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도대체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상황만 놓고 보면 그 언약궤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에 의하면 그 언약궤는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무기력하게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그 언약궤는 여호와의 언약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뜻대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신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이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물건이 아닙니다. 미신적인 어떤 힘을 부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보여주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대로 행하시는 것이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믿음, 미신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했던 그릇된 믿음이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요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중요한 일, 큰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우리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수아가 그러했듯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재를 뒤집어쓰고 애통해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애통한 심령과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깊이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이런 일이 있든 저런 일이 있든 상관없이 복되고 기쁜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잘 모르시는 찬양입니다만, 가사가 너무나 은혜로워서 준비했습니다. 오늘 받으신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가사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아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인격적으로 만져주십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기르시는 참된 목자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이 삶이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기계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악용하려는 자들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여호수아처럼 애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에게 큰 은혜 부어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