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도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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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 16:1-16
제목 :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도의 오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서 단순하게 우리 옆에 맴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걸음, 걸음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인생에 세밀하게 개입하시는지에 관해서 성경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해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믿음이 연약한 성도의 경우에는 평소에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역사해 주십시오. 간절하게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구합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계속해서 드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어떻게 하시는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간절한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경우가 있고, 응답이 더디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거절하시거나 거부하시는 경우. 이렇게 세 가지 경우를 기억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단정 짓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고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축구 경기에서 2:1로 졌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1:1의 박빙의 승부 끝에 경기 종료를 앞두고 한 골 먹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경기가 끝나버리면, 보통 마지막 한 점을 내주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선수들이 욕을 가장 많이 먹죠. 수비수가 되었든 골키퍼가 되었든 마지막 한 골을 먹히도록 관여한 선수들이 질타를 받게 됩니다.
자, 그런데 과연 마지막 골을 먹힌 것만 문제일까요? 생각해 보면, 경기에서 패배한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보통 첫 번째 골을 먹힌 것보다 두 번째 골을 먹힌 것에 대해 더 큰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습니다. 먼저 점수를 내주든, 역전을 당하든, 똑같이 한 점을 주는 것은 동일한데, 막판에 먹히면 지키지 못했다느니, 그 한 골 때문에 졌다느니. 이런 식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첫 번째 골을 먹히지 않았다면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먹히더라도 동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동점 상황으로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다가 종료 직전에 극장 골이 터지면 마지막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온갖 스팟라잇을 받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골이 없었다면 역전 골도 없었겠죠.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축구로 예시를 들었지만, 스포츠 경기 외에도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인과 관계, 다양한 원인과 결과가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할 때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대인관계를 맺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내가 어떤 어조와 표정으로 대화를 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겠죠. 불친절한 표정과 틱틱거리는 말투로 일관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경청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공동체 내에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렵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교회에서 교제하라고 해서 교제했는데, 사람들이 저를 싫어합니다. 제가 이 공동체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너무 속상합니다. 저 사람들의 마음 좀 돌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응하시는 것이 옳겠습니까? 마치 무슨 최면을 걸듯이, 레드 썬! 하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황이 180도 변하도록 역사하셔야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떤 갈등이나 문제에 얽힌 사람들을 다루실 때, 누구 하나 차별 없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 주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갈등이 발생했을 때 나의 잘못이나, 실수를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내 입장에서 나에게 편한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건강하지 않고, 바르지 않은 생각에서 나오는 무지한 간구는 하나님께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한들, 하나님께 짐만 안겨드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는 본문 말씀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이 세 사람이 빚어낸 갈등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도의 오해에 대해서 깊이 상고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의 타임라인을 보면서 팩트 체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타임라인은 아브라함의 시점에서 본문의 이해를 돕는데 필요한 사건들만 취합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임라인 (in) 첫 번째, 창세기 12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75세일 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서 자신의 고향인 하란을 떠납니다. 이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0절 말씀을 보시면, (in)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out)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의 가장 큰 문제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갈등도 불임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죠.
이어서 두 번째 타임라인, (in) 창세기 16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85세 또는 86세일 때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in) 세 번째 타임라인, 아브라함이 86세일 때 하갈이 이스마엘을 출산합니다. 이스마엘이 몇월에 태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번째 타임라인에서 아브라함이 85세 또는 86세일 때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어서 네 번째 타임라인, (in) 창세기 17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99세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이름을 개명해 주시고, 다양한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해주시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엄청난 언약에 대해서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아들이라고는 애굽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입니다. 세 번째 타임라인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고 네 번째 타임라인 창세기 17장. 16장 내용 바로 다음에 17장이 나오는데, 17장 내용을 보면, 이스마엘이 태어난 이후에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자식이 나올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성취의 지연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엄청난 언약을 맺어주시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성취된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타임라인, (in) 창세기 21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이 태어납니다. 기적적으로 불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죠. (out)
자, 이렇게 아브라함의 타임라인만 놓고 보면, 아브라함의 인생 후반전인 75세부터 100세까지의 시기는 하나님을 만나서 고향 땅을 떠나 방랑하면서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을 겪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축복받은 인생인 것처럼 보입니다. 언약의 성취가 지연되기는 했습니다만, 언약의 성취로서 이삭을 낳게 된 것도 그렇고, 좀 더 지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증명해 낸 것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아름답게 빚어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 가운데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16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만약 성경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창세기 16장을 읽는다면, 창세기 16장의 주인공이 하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 모두 창세기 16장에서는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갈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모습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 해당 내용을 살펴볼텐데요. 먼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본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2절 말씀 보세요. (in)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5장 4절 말씀 보세요. (in)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너의 상속자가 아니라 너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out) 이런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십니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아주 은혜로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인격적으로 믿고, 또 하나님은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겨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문제는 16장에서 등장합니다. 16장 2절 말씀 보세요. (in)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out)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와 비교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신이 안된다고 해서 여종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고대 문헌인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 문헌, 구 앗수르 결혼 계약서, 신 앗수르 문헌. 이런 다양한 고대 문헌들에 따르면 임신이 안 되는 경우에 여종을 대리모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법적인 관습에 의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자신의 하녀 또는 여종을 자기의 남편에게 아내로 줄 수 있었으며, 여종에게서 낳은 자식은 여주인의 자식으로 간주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래의 제안은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아브라함으로서는 반대하기 어려운 제안이었겠죠.
자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16장 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in)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라는 사라의 말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낸다거나, 사라의 말대로 행동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관련해서 고민하고 소통하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소통하지 않고 그냥 사라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가부장적인 고대 근동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아브라함이 굉장히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아브라함의 수동적인 모습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라의 말대로 하갈을 취하자, 얼마 되지 않아서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하갈이 기세가 등등해져서 자기의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자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불만을 토로하죠. 16장 5절 말씀 보세요. (in)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라는 하갈과의 갈등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이 문제를 맡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다시 사라에게 떠넘깁니다. 16장 6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족장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남편의 말 한 마디에 가정사가 좌지우지되는 그런 시대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문제 해결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겁니다. (out) 자 그렇다면, 사라가 하갈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너어? 그러면 안돼. 알았지? 이런 식으로 타이르듯이 좋게 얘기하겠습니까? 그럴 리 없겠죠. 사라와 하갈이 동등한 관계도 아니고, 여주인과 여종의 관계이기 때문에 말이 좋게 나올래야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결과는 당연하겠죠. 16장 6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out)
자, 이렇게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다기보다, 굉장히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때 가정의 질서를 바로 세웠다면 어땠을까요. 여주인을 멸시한 하갈의 태도를 바로잡고, 상처받은 사라의 마음을 충분히 위로하고 더 사랑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갈이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사라의 시점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라는 오랜 시간 동안 불임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서 고향 땅을 떠날 때 같이 떠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언약이 성취되기를 같이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자손에 대한 약속은 성취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란을 떠났고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12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 과정이나 방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노력으로 자식을 낳고자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그 당시에 당연하게 행해져 내려온 방법, 여종을 대리모로 취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죠. 본인이 아이를 낳는다면 가장 행복하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낳으려 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남편에게 먼저 제안한 겁니다.
하지만 사라는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의 여지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하갈이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여종이 아이를 낳았다고 여주인과 평등을 주장하면 여주인이 직접 여자 노예를 팔 수는 없지만, 여자 노예를 다른 여러 노예들 중에 하나로 여기고 부릴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구 앗수르와 신 앗수르 문헌에 따르면, 여종이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여종은 다른 집 노예로 팔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고대 문헌들이 창세기 시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이러한 시대상을 고려해보면, 하갈이 사라를 멸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는 것도 시대적인 배경 하에서 어느 정도 허용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사라가 인내했다면 더 좋았겠습니다만, 사라의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라는 부족의 여주인으로서 자신의 권리가 여종에게 위협당하고 침해당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습니다. 사실 본문은 하갈이 사라를 어떻게 멸시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여성분들은 아마 잘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특유의 여자들 간의 기싸움. 뭐 이런 것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하갈이 그동안 여종으로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이스마엘을 임신하고 나서 태도가 바뀌었다면, 대답할 때 어조나 말투가 바뀌었다거나, 행동이 바뀌었다면, 여주인으로서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라는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남편에게 답변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해라. 그래서 사라는 알아서 했습니다. 그 결과 하갈은 집을 나가게 되었죠.
자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대리모로 준 것과 하갈을 학대한 점. 이런 내용은 어떻게 보면 시대적으로 허용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의 저자 역시 사라가 너무했다. 사라가 잘못했다. 사라가 죄를 지었다. 이런 식의 설명을 달아놓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라의 잘못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자 했던 것. 이것이 사라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하갈의 시점에서 본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임신하기 전까지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만, 하갈은 일종의 애 낳는 기계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죠. 마치 도구처럼 사용된 겁니다. 시대적인 배경 아래에서 허용된 일들이지만, 안타깝게도 기구한 인생을 살아간 여성이라고 볼 수 있겠죠.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하갈을 지칭하는 표현은 모두 여종으로 사용됩니다. 1절에서도 여종, 2절에서도 여종, 3절에서도 여종, 5절에서도 여종, 6절에서도 여종, 심지어 8절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사래의 여종 하갈아.” 이런 식으로 하갈은 계속해서 여종으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하갈의 정체성은 여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을 하갈이 무너뜨립니다.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족장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본인의 정체성, 여종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참으로 미련한 행동이죠. 만약 하갈이 사라를 만만하게 보거나 멸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종이라는 지위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족장 아브라함의 총애를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은총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갈은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망각하고 가정의 질서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 갈등이 극대화되었죠.
자 이렇게,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세 사람의 시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습니다만, 이 일에는 아브라함, 사라, 하갈. 세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수동적인 자세로 사라가 하라는 대로 여종을 대리모로 취합니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에도 수동적으로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자세를 취합니다.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문제가 생기면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이건 뭐 남편이란 존재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죠. 본인이 족장이고 가장이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창세기 16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갈등이 이렇게까지 불거진 데에는 아브라함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사라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언약을 성취하려고 행동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시발점은 사라에게 있었고, 하갈의 처분을 위임받았을 때, 하갈이 집에서 나갈 정도로 학대한 것 역시 사라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라 역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죠.
마지막으로 하갈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가정에서 본인의 위치를 망각하고 여주인을 멸시한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주인 대신 본인이 임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사라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월등한 여성처럼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비록 그렇게 느낀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과 외부로 표출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갈은 사라로 하여금 본인을 학대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창세기 16장 말씀에 따르면 성도의 무분별한 행동에는 그만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돌이키려는 노력이나,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사라, 하갈 이 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갈이 사라를 멸시했고, 사라가 하갈을 학대해서 하갈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에게 어떻게 역사해 주셔야 마땅할까요. 사라의 입장에서는 하갈이 괘씸하니 하나님께서 하갈을 심판해 주셔서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주셔야 마땅할까요? 하갈의 입장에서는 거지 같은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으니 새로운 보금자리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셔야 마땅할까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필요하니 어떻게든 하갈이 아들을 낳아주기만 하면 될까요? 네. 세 사람의 입장은 모두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창세기 16장 8절 말씀 보세요. (in)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일단 여호와의 사자,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하갈이 부르짖은 것도 아니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겁니다. (out)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분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시냐. 처음부터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처가 곪아터지는 일이 없도록 중간에서 막아주시면 되지 않았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러 가지 인과 관계가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모두를 흡족하게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일하시는 것은 성도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스스로 반성하고 돌이키는 과정을 통해 영적인 성숙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무슨 문제만 생기면 하나님이 짠하고 나타나셔서 다 해결해 주시는 것만이 은혜라고 볼 수 없는 겁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먼저 첫 번째는, 하갈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시고 두 번째는 이스마엘이 탄생한다는 소식과 그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갈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과 나중에 하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죠. 시간 관계상 하갈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겠습니다만,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서 이런 저런 약속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이 과정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갈은 성경에 등장하는 여인 중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인물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의 말씀을 주신 첫 번째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갈은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큰 은총을 입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내용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6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갈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이 떨어집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 사라, 하갈. 이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 모든 원인과 결과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갈이 낳을 이스마엘이 크게 번성해서 수가 많아 셀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하갈이 해야하는 일을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갈은 어지간한 각오로 집을 뛰쳐나온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나오면 무슨 수로 살겠습니까. 요즘은 뭐 돈만 있으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에는 숙박업소도 없고 제대로 된 병원도 없습니다. 집에서 건강관리를 잘해서 출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갈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도망 나온 겁니다.
자 그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역사하신다면,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최선일까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셔서 음식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통해 따뜻하게 노숙하게 해주시고,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해 주시고. 이런 부분을 예상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계신 상황에서 명령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하갈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옵션이었을 겁니다. 만약 하갈이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들들 볶아대지 않겠습니까? 무슨 낱짝으로 집에 돌아왔냐고. 무슨 생각으로 임신한 여자가 집 밖으로 기어나가냐고. 이런 식의 별의별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하갈에 대한 학대가 중지될 일은 없습니다. 마치 학교 숙제 안 해가면 선생님께 손바닥 맞는데, 내가 숙제 안 한 날만큼은 선생님이 숙제 검사 안 하시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죠. 물론 창세기 16장에는 하갈이 집으로 돌아가서 사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 많이 하면서 살아갔는지 그런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편안하게 살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는 하갈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냥 하갈이 집밖으로 나가보니 먹고 살기 힘드니까 들어왔겠거니. 아이를 낳아야 하니까 돌아왔겠거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명령에 하갈이 순종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언제나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계속해서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과 내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만을 바란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경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사라는 사라대로, 하갈은 하갈대로 나름의 사연이 존재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불임의 문제, 성취의 지연 문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도한 인간적인 노력들. 이로 인해 이스마엘을 임산하게 되었으나 여종이 여주인을 멸시하고, 또 여주인이 여종을 학대하는 이런 갈등이 극대화된 드라마 같은 상황이 창세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창세기 16장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매순간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놀라운 기적, 불이 떨어진다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이런 기적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여주인에게 학대당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간 하갈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본인이 여주인의 속을 벅벅 긁어서 학대 당해서 뛰쳐나왔는데, 그런 자신의 발길을 집으로 돌이키고, 여주인의 권위에 복종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도의 오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깊이 있게 묵상하시면서,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를 주님의 크신 은혜로 건져내 주시고,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오해한 부분이 없었는지, 우리가 마땅히 져야하는 책임들에 대해서 회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질서를 바로 세우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되게하여 주시고, 가정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 역시, 주님의 뜻 가운데 아름답게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도 은밀하게 역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걸음을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굳건히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주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크신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삼일 저녁에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영광 올려 드리게 하시고, 충만한 은혜 누리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시간 교회를 위해, 국가와 사회와 열방을 위해, 장기투병 환우 및 긴급 환우분들을 위해 마음 모아 한목소리로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타인의 유익을 먼저 구하며, 주님을 사랑하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하여 악한 시대에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