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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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21:15-23
제목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영화가 끝나면 엔딩크레딧이 나옵니다. 영화 제작과 관련된 상세 정보가 나오죠. 엔딩크레딧에는 배급사, 제작사, 감독, 배우, 제작진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어떤 영화들에는 엔딩크레딧에 추가적인 영상이 들어있는데요. 이를 쿠키영상이라 부릅니다. 쿠키영상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길 수 있습니다. 영화 에서 주인공이 사망하면 주인공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 나올 수도 있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엔딩 이후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짝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겨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1장은 영화로 표현하자면 엔딩크레딧에 삽입되어있는 쿠키영상과도 같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책으로 표현하자면 에필로그와도 같죠. 왜 그러한가 하면,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이 나오면서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은 종결됩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이 등장하죠.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영화화해서 머릿속으로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의 공생애를 떠올릴만한 여러 단서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상상하면서 말씀을 생각하시면 좀 더 잘 이해되실 겁니다. 지금부터 상상력을 발휘해주세요.
요한복음 21장 초반부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합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져보지만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 해안가에 서서 쉬지 않고 그물을 던지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곤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니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잡힙니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던 날,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말하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21장 9절 말씀을 보시면서 상상해보세요. (화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제자들이 가득 잡은 물고기를 끌고 육지로 올라오자 숯불이 놓여있습니다. 여기서 숯불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7절 18절 말씀 보세요. (화면)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아멘.
우리말 성경에서는 불이라고 나오지만 요한복음 21장 9절의 숯불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이 숯불이라는 단어는 딱 두 번만 등장합니다. 만약 여기저기서 많이 등장한 단어면 그냥 숯불이구나, 불이구나 하고 넘어갈텐데, 딱 두 번 등장하는데, 느낌상 이 단어가 나오는 곳에는 베드로가 항상 있습니다. 그럼 뭔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숯불이라는 단어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믿음과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부인하고 불을 쬐던 때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피워놓으신 숯불. 두 배경이 겹쳐지지 않으시나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베드로의 작아진 모습을 보여주는 숯불과 베드로의 허기를 달래는데 사용될 예수님께서 피워놓으신 숯불. 두 장면이 겹쳐지시나요? 과거의 숯불은 베드로의 수치와 비참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숯불을 피워주십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21장에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단서들이 존재하는데요. 그중에 가장 극적인 내용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에 등장합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 말씀 내용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이지만 조반 먹은 장소에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라고 되어있죠. 제자들도 모두 다같이 함께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16절에서도 동일하게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17절에서도 똑같이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이렇게 부르시는 내용은 요한복음에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 말씀을 보세요. (화면)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아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이 말씀 이후에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 혹은 베드로 라고 불립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를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어떻게 부르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르심으로써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15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상반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아멘.
이제 여기서부터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사랑하다 라는 동사의 쓰임새입니다. 헬라어로 사랑하다 라는 동사는 아가파오와 필레오. 두 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유명한 해석 중에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가파오는 가장 고귀한 사랑, 필레오는 조금 덜한 사랑. 우정과 같은 그런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물어보셨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필레오 한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베드로의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해석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이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필레오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야곱이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다고 말할 때,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사용됩니다. 또 암몬이 자기 누이 다말에게 몹쓸 짓을 한 일과 관련해서 누이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때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둘 다 사용됩니다.
따라서 필레오와 아가파오는 둘 다 같은 의미로, 같은 정도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파오하느냐. 베드로가 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 사랑은 진짜 큰 사랑, 베드로는 조금 덜한 사랑. 이렇게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가파오와 필레오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무엇을 집중해서 봐야 할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 번 물으시는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16절,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번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 보세요. (화면)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근심합니다. 왜 근심합니까? 예수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도대체 왜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을까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사랑이 생깁니까?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한테 사랑하냐고 계속 물어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까? 그것도 아니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어보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심오한 신앙고백을 세 번이나 요구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인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도 아신다는 사실에 호소합니다. 17절 뒷부분 보세요. (화면)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아멘.
베드로의 대답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저의 비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차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마음을 모르셨기 때문에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고,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씻어내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 내용 가운데 집중해서 보아야 할 내용은 두 번째로,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15절 제일 뒷부분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6절 제일 뒷부분 보시면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시죠. 또다시 17절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명령하시는 내용은 같지만 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15절에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또 어디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시고, 또 어디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셋다 하라고 하시는 건지, 내 양을 먹이라는 것만 똑같고 내 양을 치라는 것만 다른 건지. 뭔가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세 가지의 명령은 완전히 똑같은 명령입니다. 앞서 사랑하다 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드릴 때, 아가파오나 필레오나 둘 다 같은 단어로 서로 바꿔가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렸죠? 그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어린 양을 양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양을 어린 양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먹이라는 말을 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치라는 말을 먹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독해를 하다보면, 똑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꼭 써야만 한다면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이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불리는 요한은 한 문단에서 같은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꼭 써야 한다면 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어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라는 세 가지의 명령은 서로 같은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강조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는구나. 선교적인 사명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말씀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내가 그런 증인이 되어야겠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막 열정이 샘솟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뭔가 선교적인 사명과는 거리가 먼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복음 전도가 아닌 목양에 강조점을 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죠. 이 명령은 목회자가 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직무를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에 누구인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먹이는 대상은 양인데 그 양이 누구의 양입니까? 그 양떼는 바로 예수님의 양떼입니다. 나의 양떼가 아닌 예수님의 양떼입니다. 우리가 돈 주고 산 양떼가 아닙니다. 우리 명의로 이전된 양떼가 아닙니다. 여전히 양떼의 소유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를 먹이는 사명을 우리 모두가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뭔가 양떼를 먹인다고 하니까 목양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목회자만 목양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목회자만 내 양을 먹일 수 있어. 자격 없는 사람은 안돼. 특별히 목회자만 할 수 있는거야. 이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건으로 제시하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양 떼를 먹임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양 떼를 먹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인간적인 수준 이상의 안목이 없고서는 교회 봉사와 양떼를 먹이는 임무를 제대로 충실하게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먹이는 임무 자체가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약한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경솔하고 미덥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은 둔하고 게으르며, 그런가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고집불통이라 가르칠 수 없다. 여기에다 사단은 온갖 장애물을 가지고 공격하려 한다.”
칼빈 선생님에 따르면, 주님의 양 떼를 먹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양 떼를 먹이는 일이 힘들고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힘들고 괴롭다 이렇게 끝내선 안 됩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한결같이 감당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자아를 망각하고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바치는 가운데 온갖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양떼를 먹이는데, 그 과정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내가 힘든걸 내가 괴로운걸 망각함으로써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떼의 범위가 정확히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소속된 택자들이 누군지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건 우리 편에서의 확신이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약한 사람, 경솔한 사람, 게으른 사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 등등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 주님의 양떼일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다 케어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20장까지의 내용에서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성육신하셨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친히 직접 기른 제자들이 실패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요한복음을 영화화해서 상상해보면, 요한복음은 이미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고 예수님께서 목표하신 바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도망갔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이 그렇게 끝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텐데, 하나님께서는 에필로그 격인 부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과거를 떠올릴 만한 단서를 주시면서 과거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시고, 숯불로 물고기를 구워 아침을 차려주시며, 베드로를 처음 만나 불렀던 이름으로 베드로를 불러주시고,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치욕스러운 괴로운 과거를 지울 수 있도록 세 번 질문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화도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양떼를 먹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님의 양떼를 먹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시길 바랍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 말로만 주님을 높인다. 말로만 고백하는 크리스챤이 아닌 주님의 양떼를 사랑으로 돌보며, 말이나 행동으로나 모두 주님을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괴로움을 친히 아시고 그 아픔을 만져주시며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알게 모르게 범죄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양떼를 돌보지 않았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교회에 다양한 사역이 중단되었지만,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삶으로 증명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주님의 제자된 삶을 온전히 살아내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각 지체들을 더욱더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부어주시옵소서. 그렇게 살아가길 간절히 소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