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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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후 12:1-10
제목 :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
21세기는 sns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sns를 활용하지 않으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10대부터 3-40대에 이르기까지, sns를 대인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sns를 과도하게 사용하다 보면, 지인들과의 소통창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 또는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예컨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 맛집에 가서 밥 먹은 사진을 올리면, 어떤 의도로 올린 걸까요? 뭐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 오늘 이거 먹었다. 이런 의미겠죠? 그런데 맛집에서 밥 먹은 사진 말고, 그냥 집에서 대충 때운 집밥 사진도 올릴까요? 네. 소소하게 해결한 집밥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쁜 접시에 정성스럽게 플레이팅 된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을 올리지, 집에서 그냥 밑반찬 두어가지에 국 끓여 먹는 이런 일상적인 밥상 사진은 왠만해선 올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계속해서 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 줄여서 호캉스가 유행하고 있다는데요. 온라인 상에서도 호캉스 사진이 굉장히 많이 업로드된다고 합니다. 아주 아주 비싸고 럭셔리한 호텔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힐링하는 그런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올리는 것이죠. 하지만 반대로 자기 방 침대 사진은 잘 올리지 않습니다. sns를 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카카오스토리에 사진 올리는 경우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본인 사진을 올릴 때 보통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올립니까? 최대한 내 얼굴과 똑같은 사진을 올립니까 아니면 내 실제 얼굴이라고 인식될 정도만 남겨두고 최대한 단점이 보완된 사진을 올립니까. 보통 실제 본인의 얼굴보다 더 잘 나온 사진을 올리기 마련이죠.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 얘기하듯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사진 찍을 때 못 나온 사진은 저도 좀 싫습니다. (하하) 교회 유튜브에 나온 제 모습을 볼 때에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참 많거든요.
자 이렇게,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때, 최대한 좋게 포장하고 싶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사회성에서 발생하는 욕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온라인상에서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심지어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자기 과시 또는 자기 자랑과 같은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됩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땅 값이 올랐다는 둥, 어떻게 어떻게 역사하셔서 어떻게 어떻게 잘 되었다는 둥, 뭐 이런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인데요. 사실 이러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정말 역사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땅을 샀는데, 땅값이 오를만한 땅을 사서 땅값이 오른 것일 수 있습니다. 뭐 결국은 그런 선택조차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자랑거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건강한 자랑거리인지 아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자랑할 거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자랑거리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자랑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영적인 과시 또는 영적인 자랑에 대해서 성도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만약 1세기에 sns가 있었다면 사도 바울이 sns에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먼저 첫 번째 자랑거리는 사도 바울의 출생지와 배경입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in)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성장했는지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성장했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고 말합니다. 가말리엘 문하란 그 당시 굉장히 유명했던 학파인데요.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out) 그런데 사도행전 22장의 문맥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고 말하는 그런 문맥이 아니라 천부장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야만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출생과 소속을 밝힌 겁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유대인으로 말하자면 엄청난 금수저이자 엘리트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때 sns가 있었다면, 그리고 만약 사도 바울이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중요하게 여겼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는 그 가말리엘 선생님께 가르침 받는 사진이나 질의 응답하는 사진이나 가말리엘 학파 학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았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만한 자랑거리를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자랑거리는 로마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in)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다양한 특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로마 시민은 군인에게 매 맞을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때나 매 맞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경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매를 맞다가 숨을 거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로마 시민의 경우에는 정식으로 기소되고 법적인 모든 절차를 밟은 뒤에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out) 이렇게 로마 시민은 형법에서 특혜를 누릴 수 있었는데, 여러 역사가들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형법뿐만 아니라 민법이나 세금 문제, 경제활동 등에 있어서도 다양한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길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아닌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강조하는 사람이었죠.
이어서 사도 바울의 세 번째 자랑거리는, (in) 영적인 신비 체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랑할만한 이야기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느정도 하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배경, 사회적인 특권과 물질적인 풍요로움. 이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생각하지 않으실텐데요. 영적인 신비 체험의 경우에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말 정말 쉽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영적인 신비 체험이라 함은, 어떤 기적적인 일, 예컨대 불치병에 걸렸는데 어떤 목사님께 안수받고 치유됐다거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기도하자마자 응답받고 치유되었다거나, 어떤 환상을 보았다거나, 꿈속에서 천국에 다녀왔다거나 하는 이런 신비 체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런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경험한 사람의 경우에는 대규모 간증 집회에 초청을 받거나, 책을 쓴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신비 체험이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고린도후서 12장 말씀에 따르면 신비 체험에 대한 자랑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길래 신비 체험에 대한 자랑을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out) 사도 바울은 한 사람에 대해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간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사도 바울의 설명이 뭔가 애매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려고 건지, 아니면 자신이 체험한 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어서 고린도후서 12장 4절 말씀 보세요. (in)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 사람이 어떤 체험을 합니까? 낙원이라는 장소에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낙원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으로 말하자면, 에녹이나 엘리야와 같이 육신을 입고 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과 같은 체험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낙원에서 어떤 일을 경험합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줬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이고, 사도 바울 본인도 그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out)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과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가 체험한 일을 동일하게 겪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런 엄청난 신비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딱 세 절로 끝내버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오늘날 누군가 이런 체험을 일반인이 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책으로 낸다면 관련된 내용으로 얼마나 많은 책을 내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 하늘로 이끌려 올라갈 때 어떤 느낌이었고, 올라가는 과정 중에 무엇을 보았고, 또 낙원에 가보니, 천국이 어떻게 생겼고, 천국의 땅바닥의 재질은 무엇이고, 뭐 그냥 별의별 것을 다 갖다 붙여서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이 살을 붙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3,4절, 딱 세 구절로 낙원 체험 이야기를 끝내버립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낙원 체험 썰을 이 정도로 끝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신비 체험에 대한 내용을 왜 이렇게 짧게 기록했는가 봤더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할 때 자랑을 왜 하나요? 좋게 보이기 위해서 자랑하는 경우도 있고, 자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데, 자랑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죠.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자기 자랑처럼 느껴질 만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습니다.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랑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며 만약에 자랑을 꼭 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약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out)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항상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말 자만하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조금만 잘 되면 본인이 잘난 줄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뭔가 좀 일이 잘 풀리고 잘 된다 싶으면, 너무나 쉽게 교만해집니다. 이러한 사람의 교만함과 자만함은 물질적인 것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신비한 일을 체험하면, 대부분 자신이 성령 충만한 줄로 압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영적인 일을 체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지체들보다 훨씬 더 성령충만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확신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말씀 앞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며, 상한 심령을 회복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상태인 겁니다.
또 기도 응답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신다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 입장에서 확실히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함부로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표면적인 현상만 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이나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경솔하게 판단하는 그런 신앙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바울은 살아있는 상태로 낙원에 다녀왔습니다. 낙원에 가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적인 신비 체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하나님께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 육체의 가시를 자기 몸에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하게 머리에서 나오는 입에 발린 고백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자신의 삶에서 본인이 누구보다 깊이 체감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하나님과 사도 바울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그런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는데요. 어떤 분은 사도 바울이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질병이 안구 질환이나 간질이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반복적인 말라리아성의 열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견해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은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체의 가시란, 가시의 찔림이 자기 육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바울을 초라하게 만들고 경멸당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칼빈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란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바울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인간관계를 맺을 때 바울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외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외모지상주의는 1세기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7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in)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0장 10절 말씀 보세요. (in)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out)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우선 사도 바울이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이렇게 말한 것을 봐서, 바울 스스로도 본인의 외모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0장 10절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말하죠.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글은 기가 막히게 잘 쓰는데 실제로 보면 뭐 별거 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죠. 이러한 사도 바울의 외적인 콤플렉스는 단순한 문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번, 글솜씨가 정말 형편없지만,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탁월한 달변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2번, 글은 정말 잘 쓰지만, 대중 앞에서 말할 때 말주변이 부족하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해서 답답함을 유발하는 사람.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글 쓰는 직업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말 잘하는 것을 고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외모와 말하는 능력. 이 두 가지 모두 갖지 못한 남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부분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께서 사도 바울의 콤플렉스에 대해서 쉽게 공감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 그림을 준비해 보았는데요. (사도 바울 초상화 in) 이 그림은 현존하는 사도 바울 초상화 중에 가장 오래된 초상화라고 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사도 바울에 대한 그림이 제각각이긴 합니다만, 여러 썰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외형적인 모습은, 키가 작고 덩치가 왜소하고, 머리가 벗겨졌고, 코는 매부리코였다고 합니다. (out)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에 말까지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겠죠. 또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차분하게 듣는 것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과, 사도 바울이 말할 때 답답하게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쁘게 생각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사도 바울의 얼굴을 보고, 또 그의 말을 들어보면 너무 너무 답답해서 도저히 좋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자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합니까? 고린도후서 12장 8절 말씀 보세요. (in)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가 직접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구합니다. 그러자 어떤 응답을 받습니까?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먼저 9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in)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것이 기도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면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고, 내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거나,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out)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구체적으로 육체의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구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은 겁니까. 아니면 거절당한 겁니까. 우리식대로 표현하면 거절당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해서 구해야 되죠?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인디언 기우제처럼 비가 내릴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하죠?
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12장 9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out)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도리어 크게 기뻐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해선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콤플렉스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도 바울의 질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 원만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현실은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바울은 자신의 외적인 모습으로 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하고 경멸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왜 기뻐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약한 곳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약함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이, 성령 충만함이란 것이 어떤 영적인 체험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약함, 육체의 가시와 같은 부분에서 더욱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상황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이 충만한 기쁨을 오늘 우리에게 전합니다. 자신의 약함, 육체의 가시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사실을 자신있게 선포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분에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줄로 압니다. 어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거나, 내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이 해결돼야만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에 따르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구했으나 어떤 말씀을 듣습니까?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이 약한 곳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약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완전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정작 사도 바울의 육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지니고 있는 육체의 가시를 보고 손가락질하면서 무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볼 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차가운 현실 가운데 크게 기뻐합니다. 지금 당장 어떤 변화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문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무엇을 자랑거리로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일궈낸 인생의 화려한 업적이나 자산 가치를 자랑거리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여러 기도 응답이나 은사 체험들을 자랑거리로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펙 상으로는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만한 훌륭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으며, 살아있는 상태에서 낙원을 체험했고, 낙원에서 하나님께 여러 계시들을 수여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체험 중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 체험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그는 이러한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러한 신비 체험의 자랑은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람을 자만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가 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십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통해 족한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변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은혜가 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교만함으로 나아가는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체험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능력은 자신의 치명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에 능력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연약하고 능욕을 당하고 핍박이 찾아들고 곤란이 찾아와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이자 능력임을 기억하시고, 족한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삶으로 주님께 영광올려 드리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부끄러워했던 여러 가지 콤플렉스들, 우리의 연약함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지 않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로서, 우리의 자만함을 억제하며,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케 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원하옵기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이 주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다 사라지고 해결되기를 원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은혜 내려주시고 우리의 삶을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며, 우리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화평의 모든 성도들 개개인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삼일 저녁에 주님 앞에 나아와 은혜 누리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주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하심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그 역사하심을 믿사오니, 주여 우리 모두에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복주의 신앙에서 벗어나 내 은혜가 족하다는 주님의 음성에도 아멘으로 화답할줄 아는 성숙한 화평의 지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간질
(1) 말을 잘하지 못함.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2) 몸이 약함
갈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런데 사도에게 주어진 육체의 연약함은 심각한 것이었다. 사도는 이를 가리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부른다. 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엄청난 시달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육체의 연약함의 심각성은 사도가 주께 세 번 간구한 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도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이 응답은 연약함을 없애는 응답이 아닌 그대로 놓아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도는 연약함이 그대로 몸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족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의 육체의 연약함을 제거하는 은혜가 아니다. 사도의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도의 연약함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9절). 사도의 약함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덮인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연약한 사도의 몸을 장막처럼 덮는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도에게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보다 약함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강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신비 체험에 있지 않고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과 연결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교만으로 나아가는 체험에 있지 않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데 있다. 말할 수 없이 연약하고 능욕을 당하고 핍박이 찾아들고 곤란이 찾아와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 바로 이곳에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게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은 연약하지만 강한 사람들이며, 가난하지만 부요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지만 강하게 살 것을 기도하고, 작지만 크게 살 것을 결심하고, 가난하지만 부요하게 살 것을 소망하고, 땅에 살지만 하늘을 움직이며 살 것을 다짐한다. 약하지만 약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땅에 살지만 땅에 살지 않는 자들. 이러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강함과 그리스도인의 강함을 깨달은 사도는 체험을 무익한 자랑으로 여기고 연약함을 자랑한다. 어리석은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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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1. 1세기에 sns가 있었다면, 바울이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바울의 신상
1) 출생지 및 소속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2) 가문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 로마 시민권 소유
행 16: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4) 영적인 체험
고후 12:1-
2. 바울의 자랑은 무엇인가?
* 육체의 가시
(1) 말을 잘하지 못함.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2) 몸이 약함
갈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라는 무익한 자랑을 한다. 주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이 사람은 대단한 체험을 했다.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 또는 낙원으로 이끌려갔다. 셋째 하늘은 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유일한 표현인데, 이는 창세기의 하늘을 창조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깊음(또는 물)을 정리하여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고, 넷째 날에 궁창의 위쪽에 일월성신을 두셨고, 다섯째 날에는 궁창의 아래쪽에 새를 만드셨다. 여기서 언급되는 셋째 하늘이란 창조시의 ‘두 하늘’로 표현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다시 낙원이라고 불린다. 신약성경에서 낙원은 눅 23:43; 고후 12:4; 계 2:7. 3회 등장한다.
바울 시대에 황홀경에 빠져 몸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는 이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몸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사도는 신비체험을 무익한 자랑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신비 체험을 열심히 사모한다. 환상에 빠지고 계시를 구하는 데 온 마음을 다한다. 그런 곳이 있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좇아간다. 또한 우리는 신기한 일들을 체험한 것에 대해서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환상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계시를 말하기를 즐겨한다. 마치 이런 체험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익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는 이를 무익한 자랑이라고 단정한다. 이러한 자랑이 성도들에게 더 이상 반복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자랑은 사도가 말하는 이 한 사람의 예로 족하다.
사도는 무익한 자랑을 넘어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다. 물론 사도에게 신비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7절). 그러나 사도는 자신의 계시 체험을 자랑하지 않는다. 무익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들을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로 무익하다. 정작 배우고 익혀야 할 가치 있는 진리 대신 쓸모없는 무익하고 기괴한 체험만을 사모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의 계시체험을 말하는 것을 그만둔다. 사도는 연약한 것들을 자랑할 뿐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로운 은혜가 숨어있다. 사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계시를 허락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시와 더불어 연약함을 허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체험만 주시고 제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으신다면 그 은혜는 어리석은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이 체험으로 인해 한도끝도 없이 교만해질 것이기 떄문이다.
그런데 사도에게 주어진 육체의 연약함은 심각한 것이었다. 사도는 이를 가리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부른다. 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엄청난 시달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육체의 연약함의 심각성은 사도가 주께 세 번 간구한 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도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이 응답은 연약함을 없애는 응답이 아닌 그대로 놓아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도는 연약함이 그대로 몸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족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의 육체의 연약함을 제거하는 은혜가 아니다. 사도의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도의 연약함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9절). 사도의 약함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덮인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연약한 사도의 몸을 장막처럼 덮는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도에게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보다 약함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강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신비 체험에 있지 않고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과 연결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교만으로 나아가는 체험에 있지 않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데 있다. 말할 수 없이 연약하고 능욕을 당하고 핍박이 찾아들고 곤란이 찾아와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 바로 이곳에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게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은 연약하지만 강한 사람들이며, 가난하지만 부요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지만 강하게 살 것을 기도하고, 작지만 크게 살 것을 결심하고, 가난하지만 부요하게 살 것을 소망하고, 땅에 살지만 하늘을 움직이며 살 것을 다짐한다. 약하지만 약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땅에 살지만 땅에 살지 않는 자들. 이러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강함과 그리스도인의 강함을 깨달은 사도는 체험을 무익한 자랑으로 여기고 연약함을 자랑한다. 어리석은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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